서독 빌리 브란트 (Billy Brandt) 총리의 동방정책은 서독이 일방적으로 동독을 흡수통일 하겠다는 정책의지의 발로는 결코 아니었다. 소련에 의한 동구유럽 공산화 확산을 막고, 동-서독 간 일정한 세력균형정책의 유지 및 분단의 관리차원에서 실행되었던 중장기 정책이었다. 이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독이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유민주주의체제로 전환될 때까지, 서독은 단 한번도 동질적인 게르만민족으로서 동-서독의 민족통일 타당성을 주장했던 바가 없다. 혈족적 민족관념을 벗어난 독일정신 다만 동독은 피를 나눈 게르만 민족국가로서 동-서독 통일을 쟁취해야한다고 가끔 언급하긴 했지만, 그 강도는 과거의 독일정신(German Geist)을 강조했던 혈족적 민족관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동독과 서독이라는 2개의 독립국가로서 상호간의 존재를 인정했고, 그 바탕 하에서 통일을 향한 외교적 노력을 경주했다. 동독이 표방했던 여러 형태의 외교적 정책중에 한 일환으로, ‘민족통일’이라는 전술적 접근법도 그 속에 포함되어진 것이다. 동독국민들은 동독의 공산체제이념이 무너진 후, 자발적으로 국민투표를 통해서 체제전환을 이루었다. 동-서독 간 동질적인 체제 형성을 근거로 상호
진보좌파든 보수우파든 관계없이, 인간의 열정 (Passion)이 모든 시대를 움직여왔고, 앞으로도 움직여 나갈 것이 분명하다. 국가통치를 위한 좌-우 지식인들 간의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이 ‘정치’라고 말한, 정치사회학자 칼 만하임 (Karl Mannheim)의 논지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지식인들이 추구하는 자신들의 이념과 가치에 대한 끝없는 열정이고, 나머지는 좌우간 권력은 결국 소수가 장악한다는 냉혹한 현실이다. 좌파들이 갖는 권력에 대한 열정은 거칠고 야비하다. 기존의 체제를 뒤집기 위해서 좌파들은 인간의 양심을 저버리는 위선과 기만, 거짓과 사기행위도 전혀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권력욕에 대한 열정은 결국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빙자한 흉악한 전체주의적 1인독재체제로 귀결된다. 반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각고의 제도개선 노력에 기인한 보수우파들의 열정은, 느리지만 인간의 양심에 부합하는 감동적인 ‘법치’(Rule of Law)의 세상을 창출했다. 시대를 넘어서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이성에 기인한 열정은, 모든 국민들이 국가의 주권을 대변하는 "상징적인(Symbolic) 주권자"로 존재하는 가운데,
흔히 한반도 5천년 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외적의 침략’과 그 침략의 시간들을 평균해보면, 아마 3~4년에 한번 정도로 크고 작은 외침을 받았을 것이라며 쉽게 얘기들 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뼈저린 고통의 역사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저 무덤덤하고 관심들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내 국제정치학자들도 대부분 국제정치가 국제관계의 일부분이라고 늘 강조하며, 마치 국제정치를 ‘국제사회학’정도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배운 바보(Educated Idiots)들의 착각 피상적으로 보면, 국가, 개인, 다국적기업, 국제NGO, ‘WTO’ (국제무역기구) 또는 ‘NPT’ (핵확산금지조약) 등과 같은 국제조약들과 ‘유엔’ 등 다양한 행위자들이 포함되는 ‘국제 레짐’ (International Regime)에 대한 연구가 국제정치보다 포괄적이다. 또한, 그 위에 국제사회의 사회문화적 역동성을 받아내는 국제관계가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 ‘배운 바보’(Educated Idiots)들이 믿고 있는, 작금의 국제정치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일 것 같다. 인간의 권력본성과 비유되는 독특한 국가본성이 내재되어 있는 국제정치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필자가 영국유학 당시, 어렵사리 돈을 모아 쉽지 않았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여행했던 적이 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필자는 두 가지 광경에 크게 놀랐다. 하나는 엄청난 노르웨이 산맥에 이리저리 터널을 뚫으면서, 사통팔달(四通八達)의 도로들을 만들어 내는 노르웨이의 터널 공법이었다. 둘째는 핀란드 젊은 청년들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높은 자살률이었다. 북유럽 청년들의 놀라운 자살률 당시 핀란드 6백만 인구 중 30%정도가 수도인 헬싱키에 살았고, 경제력과 국가투명성 정도에서도 단연 앞서나가는 선진국가였지만, 문제는 핀란드 젊은이들의 정신세계가 우울했고, 많이 아팠다. 헬싱키 관광지 여기저기에서 아침부터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고, 술 취한 청년들의 자살률은 여행객의 상상을 초월했다. 보다 못한 핀란드정부가 청년들에게 일주일 중 화요일 하루에만 술을 팔아야 한다는 비민주적인 결정을 내릴 정도까지 청년들의 알코올문제가 심각했다. 마치 영혼을 상실해버린 것 같은 핀란드 청년들의 모습에 필자도 그 원인을 캐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주된 원인은 지나친 포퓰리즘(Populism) 복지제도에 따른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노
지난 4월 서울과 부산 지방선거 참패이후 文대통령의 발자취가 가관이다. 한미정상회담이후 런던 G7 참석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돌부처’같은 ‘내로남불’의 페이스는 간데 없고, 한마디로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그래도 꼭 한 가지 북한에 대한 구애는 여전히 ‘일편단심(一片丹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文정권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묵묵부답(黙黙不答)이라는 점이다. 북한은 오로지 미국의 동태만 살피면서 슬금슬금 미국과의 대립 또는 대결국면을 대비한 ‘기 싸움’에 몰입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기야 남쪽 정부에게 온갖 악설을 다 퍼부어도, 북을 향한 일편단심이 가실 줄이 없으니 이제 더 이상 ‘남쪽 정부’는 고려할 대상이 아닌 샘이다. 국제정치와 평화 조지 오웰 (George Orwell)의 ‘1984’ 내용처럼, 전쟁 상태도 평화로 ‘세뇌’ 시킬 수 있다고 보는지 文대통령은 입만 열면 몽상적인 평화타령이다. 원래 국제사회에서 평화상태의 개념은 국가 간의 자율성과 평등을 전제한 채, 경쟁관계는 인정하되 종속과 억압을 부정하는 일종의 ‘세력균형(勢力均衡)’ 형태가 지속되는 상황을 말한다. 인류의 근, 현대사를 보면 평화야말로 얼마나 깨지기 쉬운 유
제국주의와 미국의 탄생 제국주의시대에 펼쳐졌던 열강의 과도경쟁은 ‘국제공법(國際公法)’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위 근대국가를 만들어 낸 ‘문명국(文明國)’으로 불리어지는 서양의 대표주자는 단연코 ‘영국’과 ‘프랑스’였다. 영국은 문명의 척도로 ‘법치’를 기반으로 하는 시민들의 공적영역에서의 시민성 (Civility)을 내세웠다. 프랑스는 언어와 문화, 외교와 예술적 가치를 우선시했다. 한때 해가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과 대비해서, 나름대로 엄청난 식민지개척 경쟁구도를 갖추었던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 독립을 원하는 미국과 손잡았으며, 영국세력을 몰아내고 미국이 독립을 쟁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에서 영국세력을 제거한 이후, 미국보다도 더 큰 방대한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던 프랑스 영토들이 점진적으로 미국에 의해 합병되었다. 이제 프랑스가 점령했던 그 광활한 북미대륙에서의 흔적은 캐나다의 몇몇 주에서만 겨우 확인될 뿐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는 신사의 나라 영국과 문화·예술의 나라 프랑스가 갖는 각각의 체화된 시민들의 습속 (Mores)이 달라서였다고 볼 수 있다. 토크빌 (Alexis de Tocqueville)은 이
李 · 坤 · 大 대구 연설회에서 이준석 후보는 “나를 정치권에 영입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감사한다”면서도 “탄핵은 정당하다”고 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이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당선을 축하했다... “아주 큰일을 하셨다. 훌륭하다”며 “우리 정치사에 길이 남을 일이며 우리나라가 변화하는 조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본의(本意)야 어찌 됐든 간에 듣고 보기에 따라서는 ‘국힘당’ 대표 경선(競選) 기간 내내 떠돌아다니던 여러 ‘음모론’에 힘을 보태는 멘트일 수도 있겠다. ‘특정 계파 배후 조종’설을 비롯해서 ‘역선택(逆選擇)노린 정치공작’루머까지... ‘음모’의 실재(實在) 여부나 맞고 틀림과 의도를 떠나서, ‘자유민주헌정 중단’으로 인한 좌절과 분노, ‘대갈빡에 피도 안 마른’ 젊은이에 대한 질시, 꼰대들의 지위 변화에 대한 두려움 등등의 반영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애국 꼰대’들의 반성은 시작되어야 한다고 감히 부르짖는다. 이른바 ‘탄핵’은 대상자 개인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떠나서 헌법적 절차로 위장된 폭민정치(暴民政治)에 의해 ‘자유민주헌정’이 중단·파괴된 반역이었다. 현재 이 나라의 형편이 그
내곡동 국정원 청사 입구에는 국정원 직원들의 애국결기와 충성심을 담는 엄청난 크기의 ‘원훈석’이 서있다. 정부청사치고는 적막하리만큼 조용한 주변 분위기와 순결을 나타내는 하얀색의 웅장한 건물들이 지금까지 목숨 걸고 대한민국을 수호해 왔던, 이름 없는 대한민국 수호천사들의 ‘헌신과 희생’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런 숭고함을 다 모아서, 커다란 원훈석에 마치 큰 바위 위에 조각된 ‘혈서’처럼 쓰여진 짧고 굶은 한마디가, 국정원 청사를 방문하는 모든 외국인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장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원훈석의 내용과 글씨체가 또 다시 바뀌었다. 지난 4일 문재인 대통령과 박지원 국정원장이 나란히 서서 새로운 '원훈'석 제막식을 거행했다. 국회에서 개정된 국정원법이 새겨진 동판을 함께 들고, 뒤로는 새로 새겨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라는 새로운 원훈석을 배경으로, 즐겁게 파안대소하는 사진이 이를 지켜보는 대한민국 자유애국시민들의 심장을 모두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그 결정적 이유는, '원훈석'에 새겨진 글씨체가 소위 ‘어깨동무체’로 잘 알려진, 그리고 통혁당 핵심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신영복의
인류최초의 전자계산기를 발명한 천재과학자 파스칼(Blaise Pascal)은 12살에 삼각형원리를 발견하고, 확률론을 전개했으며, 14살에 이미 프랑스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후세에 그는 수학자, 과학자, 발명가, 문학가, 심리학자, 철학자, 그리고 도박사로도 이름을 크게 남기는 특별한 계몽주의 철학자로 기억되고 있다. 파스칼이 32세 되는 해에, 지금으로 치면, 교통사고와 비슷한 ‘마차사고’를 경험한다. 크게 충격을 받은 파스칼은 3년 이상 외출을 삼가며 집에 칩거하면서, 오로지 '신(God)‘ 하고만 대화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수상록이 바로 ‘팡세’ (Pensees)다. 인간의 본성을 관통했던 파스칼은 ‘바벨탑의 허무’를 감당 못하는 인간은 연애, 정치, 권력투쟁, 전쟁과 같은 ‘기분풀이’ 놀음을 하는데, 허무한 일상을 가장 쉽게 잊기 위한 효과적인 기분풀이로 ‘도박’ (Gambling)을 얘기하고 있다. 사형수로 죽음의 공포와 위기를 넘나들었던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Dostoevski)도 사망하기 직전까지 도박의 유혹을 평생 뿌리치지 못했다.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던 파스칼의 인생이 그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것
李 · 坤 · 大 인터넷 ‘어린이백과’를 검색해봤다. 꼰대가 왜 갑자기 ‘어린이백과’냐고? 이 나라의 장래를 책임질 ‘어린이’들은 어찌 배우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법무부는 법률에 대한 사무를 맡아보는 중앙 행정 기관이에요. 검찰, 인권 보호, 교정, 보호 관찰, 소년 보호, 출입국 관리 등 많은 일을 책임지고 있는 기관이지요. 법무부 아래에는 검찰청, 교정기관, 보호관찰기관, 소년보호교육기관, 출입국 관리 기관 등이 있어요...” “검찰청은 각종 범죄를 수사하여 법원에 재판을 청구하고, 재판의 집행을 지휘하는 곳이에요...” 어렵다. 꼰대들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어린이들이야... 역시 ‘법’(法)은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불문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함부로 접근할 영역이 아니라는 두려움마저 느껴진다. 그런데... “박범계 법무장관이 피고인 신분으로 ‘국회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 폭행 사건’ 재판에 섰다... 2019년 4월 26일 여야(與野)는 공수처 설치법 등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법안)에 올리는 것을 두고 충돌했다. 여야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빚어지는 과정에서 당시 민주당 의원이었던 박 장관도 야당 인사들을 폭행했다는 게 검찰 조사 결과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한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지문(指紋)이 각양각색이듯이 모든 인간의 겉모습은 하나같이 다르다. 그리고 태어나면서 마치 ‘흙수저’와 ‘금수저’ 관련된 사회논란처럼 인간의 주변 환경도 천차만별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자유민주주의사회 내에서 모두 평등한 것인가? 그것은 모두가 약속한 공동체의 법적, 제도적 가치 하에서, 다시 말해 ‘공적영역(公的領域)’에서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가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개인의 가치를 효율적으로 지켜주기 위해서, 마치 성경에서 창조주가 빛이 있으라 하니 세상에 빛이 생겼다는 신앙인들의 믿음처럼, 일단 자유민주주의를 순조롭게 운영하기 위해서 가장 기초적인 전제조건으로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그렇게 서로 믿고 합의하는 것이다. 자신이 세상에 난 이유를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다’고 윽박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적영역에서의 개인사이지, 공적영역에서의 개인의 가치와는 함께 거론 될 수 없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이런 주장 또한 객관화될 수 없다. 개인의 탄생도 인간의 출생문제와 비슷한 기원을 갖는다. 소위 몇몇 문명국이라 칭하는 서구열강
공자의 제자 맹자는 그의 책 ‘진심(盡心)’편에서 스승인 공자를 우러러보며 칭송한다. “공자께서 노나라의 ‘동산(東山)’에 오르시니, 자신이 자랐던 노나라가 작게 보였고, 공자께서 ‘태산(泰山)’에 오르시니, 온 천하가 작게 보였다.” “바다를 맛 본 사람은 시냇가에서 물을 논하는 사람들과 견주기 힘들고, 성현의 문하에서 배운 학자는 그 학문의 경지를 시골서생들과 비교하기 힘들다.” “해와 달과 같은 위대한 인격을 갖추면, 아무리 작은 틈새라도 그 빛이 비추지 않는 곳이 없나니...” 이 맹자의 ‘관해난수(觀海亂水)’ 라는 사자성어는 통혁당의 주역이었으며, 이후 전향서를 쓴 후 성공회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했던, 자칭 위대한 서예가 신영복의 한 필체 모델로도 유명한 사자성어다. 그밖에도 신영복의 액자화 된 서체는 ‘춘풍추상’, ‘더불어 숲’, ‘처음처럼’, ‘사람 사는 세상’, ‘사람 중심의 세상’ 그리고 관해난수를 한글동화로 풀어서 이야기하는 ‘토끼와 코끼리’, ‘토끼와 거북이’ 등 외에도 다수가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신영복의 ‘춘풍추상’ 서체는 문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사상가의 글씨라서 그런지, 청와대 접견실 내 가장 눈에 잘 보이는 중앙벽면에 액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