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을 발판으로 산업혁명에 성공한 구미열강들은 넘쳐나는 부(富)로 과대 생산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어딘가 자신들의 생산을 소비시키고, 지속적인 생산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식민지역들이 간절히 필요해졌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들의 근대국가 건설과정에서의 가치신념인 자유주의적 인권개념을 내팽개치고, 신의 의지를 욕되게 할 수는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지우는 것이었다. 국가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명분으로 탐욕스런 관료들이 제일 먼저 식민지 개척을 위한 제국주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나갔다. 그리고 자본과 이재를 밝히는 서민과 노동자계층들까지도 연합해서, 자신들의 욕망과 신분상승의 가능성을 채워줄 수 있는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어쨌던 자신들의 행동을 선화시키는 적절한 대의명분이 필요했는데, 그들의 영민함은 바로 자유주의 내부의 기독교 개념과 식민지 개척을 연결시키는데서 찾았다. 원시적 야만에 빠져서 하나님이 창조한 위대한 문명을 모르는 지구촌 변방지역의 원시 부족 같은 <나시옹> (Nation)들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신 앞에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는 소위 신의 은총을 받은 “백인들의 소명의식”(White Man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인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라는 3가지 정치체제의 혼합물이다. 한때 <역사의 종말>을 쓴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신의 형상을 닮은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선의 제도라 칭송하며, 이로써 인류의 모든 역사적 진보과정은 끝이 났다고 말했던 적도 있다. 물론 후쿠야마의 주장이 나오자마자, 헌팅턴(Samuel Huntinton)의 <문명충돌론>이 나오고, 정치적 낭만주의에 기반한 각국의 독특한 민족주의 창궐로 인해, 자유민주주의 이후의 세상도 결코 만만치 않는 역사적 갈등과정이 노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적 문명을 인류가 받아들이면서, 과거와 비교해 넘쳐나는 경제적 풍요로움과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과거역사가 누리지 못했던 오랜 평화시대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인류는 1천년이 넘는 인고의 시간을 가졌다. 자유주의의 기원을 찾아가보면 그 역사적 과정은 1215년 영국의 대헌장 (Magna Carta Libertatum)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헌장은 영어로 “The Great Ch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이고 활력이 넘쳐난다. 이 나라 국민(國民)들에게 커다란 보람과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고 한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그저 주민(住民)들’이나 ‘남녘 인민(人民)들’이야 울화통이 터질 테지만... 바야흐로 ‘집권 야당’(執權 野黨)의 막바지 전성시대가 펼쳐지는 중이다. 드라마틱하다. 담대(膽大)하고 다양(多樣)한 ‘대장동’의 스토리가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꾸준히 선사한다.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그 언제 적 구수한 고향 내음을 새삼 일깨워 준 ‘돈봉투’. ‘코인’인지 ‘코가 꿰인’인지... 세종 할아버지나 사임당 할머니가 그려지지 않아도 엄청난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중이다. 여기저기서 살(肉) 더듬이들도 설쳐대며, 이른바 ‘민생’(民生 사람살이)의 은밀한 멋과 맛까지 풍겨준다. 이런 세트 메뉴와 더불어서... 양곡관리법, 간호법, 방송법 개정안, 학자금 대출 이자 면제법, 노랑봉투법 등등... 진짜 ‘민생’(民生 민주당 살리는) 법안들을 신속·적절·과감하게 몰아붙인다. 사사건건 그 무슨 ‘거부권’을 유도해서 정치적 ‘반사 이익’을 볼 거란다. 이미 그 저의와 실체를 여러 언론에서 까발려서 과
인간의 생각과 가치는 긴 세월속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초감성적 인성을 지닌 시인의 세계와 표현력은 한마디로 변화무쌍하다. 영국 왕실 계관시인이자 영국의 낭만주의를 선도했던 윌리엄 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의 시 <무지개> (A Rainbow)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특히 시 구절중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표현은 수백년을 이어서 작금에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대표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인간의 영혼을 노래했던 시인은, 노년에도 무지개를 보고 아이의 마음처럼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이는 이미 죽은 영혼이라고 단언할 정도로 순수한 영혼에 대한 주관적 명제가 다소 과격했다. 그랬던 시인은 파리에서 기거하던 중 1789년 프랑스혁명과 광장의 기요틴(단두대)으로 이어지는 인민재판을 직접 목도하게 되었다. 그후 그의 표현력은 점점 보수적으로 또는 현실적으로 달라져 갔다. 말년의 시인은 “남아있는 삶의 희망은 가느다란 풀잎 위에 맺힌 아침이슬처럼 헛된 것이다”고 묘사하거나, “희망이야말로 퀘퀘한 좁은 골목 여기저기 쳐져있는 거미줄같이 불편하고 볼썽사나운 기대”라고 표현하
선동과 기만에 능숙한 얼치기 지식인들이 주도했던 해방 전후사로부터 연연히 이어오는 대한민국 운동권 종북 좌익들은,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라고 늘 선전, 선동해 왔다. 당연히 이들 좌익들의 첫 번째 정치적 목표는 한마디로 번영하는 자유대한민국의 파괴였다. 친일에 붙어먹은 기회주의적 매국노들이 산업화를 이용해서 사회기득권이 되었다면, 이제 차별받고 착취당했던 민중과 노동자가 대한민국을 합법적으로 절단 낼 단계가 되었다고 좌익들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때 바다이야기 비리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문정권 5년 동안 주식, 부동산, 코인 조작 및 사기로 나라가 거의 거덜났다. 광주의 아들이자 이재명의 황태자였던 김남국 의원의 코인 조작은 아마도 깃털에 불과한 것 같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져야 하는 20-30 청년들중 일부는, 물질주의에 빠져 코인 한탕주의를 도모하다가 김남국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의 실패와 손실을 정부가 보상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신적 가치가 이토록 타락했다면, 어쩌면 대한민국 파괴를 노리는 좌익들의 뿌리깊은 사회공작들이 이탈리아 공산당 창시자인 그람시 (Antonio…
자유주의 아버지 존 로크 (John Rocke) 사상이야말로 지구촌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원리이자 근간이다. 계몽주의 철학자이자 자유주의 사상가였던 로크는 정치와 법철학 외에 의학, 농학, 과학 분야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긴 천재였다. 방대한 로크의 정치사상은 자연법, 소유권, 계약 등의 3가지로 쉽게 요약할 수 있다. 독실한 청교도 신자이기도 했던 로크는 신이 인간에게 자연법, 그리고 양심과 이성을 주었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도 인간은 적절한 균형을 이루면서 서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설사 삶의 과정에서 분열이나 갈등이 생긴다 하더라도 인간의 이성은 갈등을 중재하고 분노를 해소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런 로크의 성선설과 선한 자연 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관계로서 거칠고 험악한 홉스 (Thomas Hobbs)적 자연 상태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로크가 국가, 정부, 시민사회에서의 계약관계를 중시한 것은, 자연 상태에서 갈등과 분쟁은 당사자들이 직접 해결해야 하는데, 국가, 정부, 시민사회와 계약을 맺어 개인의 권한을 위임하면 이들이 확실한 심의관 노릇을 해주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의 천부적 가치와 생명, 재산과 자유에 대
“의회와 소통하고 야당과 협치하겠다”던 윤 대통령의 발언과 달리 여야 협치는 사실상 공전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취임 1주년이 며칠 지났다. 그 어간에 여러 언론매체에 오르내린 화두(話頭)가 바로 ‘협치’(協治)다. 많이 배우셨다는 전문가, 글깨나 쓴다는 문장가, 꼰대면서도 아닌 척하는 원로 등등이 지적질과 함께, 칭얼대고 계신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승만은 친일 매국세력의 아버지이고,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국정을 파괴하고 인권을 침해했던 독재자입니다... 친일 매국세력의 아버지, 인권침해 독재자에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습니다...” 고개를 숙이던 떨구든 그건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집권 야당’(執權 野黨) 대표의 저 심연에 깔린 이 나라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의 일단이 저러하다고 한다. 과연 그 족속들과의 ‘협치’(協治)가 이 나라의 제대로 나갈 방향과 일치할 수 있을까. 그저 ‘누이와 매부’가 함께 해 처먹는 짝짜꿍 정파(政派) 놀음, 즉 ‘협잡’(挾雜)에 다름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나. ‘발언을 공전(空轉)시킨’ 주인공의 선택을 크게 존중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11일 '김재원·태영호 최고위원' 징계
어둡고 어스스한 베를린의 거리보다는 남부 독일, 특히 뮌헨의 거리는 밝고 활기차다. 라인강을 따라 배를 타고 올라가는 강변 기슭에는 품위있고 고풍스런 고성들의 퍼레이드가 인상적이다. 목가적인 남부 독일의 전원풍경은 한마디로 낭만적이다. 그러나 이런 외향적 풍경속에 정치적 내부 불만과 지정학적 생존 위협으로 점철된 비뚤어진 독일의 질투심과 경쟁심이 존재한다. 기실 당대 문명국으로 자칭했던 영국과 프랑스의 문명론과 정반대되는 혈통과 종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신화와 영웅을 동경하고, 몽상적 자연속에 평화로운 삶을 이어가는 비현실적인 군주와 유기체로 한 몸이 된 민중(Folks)을 칭송하는 정치적 낭만주의(Political Romantism)가 잉태되었다. 합리적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 철학자들 눈에는 신의 계시를 빙자한 교권(敎權)의 가혹한 통치 만행이 캄캄한 암흑시대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썩는 내음이 진동하는 부패한 교권에 대한 저항은 유럽 전역에서 동시에 발생했다. 피렌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신성로마제국 마르틴 루터의 종교혁명, 유토피아를 집필했던 영국의 토마스 무어 등이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이태리 도
대한민국 엔 세개의 노동조합이 있다. 한국노총, 민주노총, 국민노조이다. 이중 가장 후발주자인 국민노조는 기득권 노조에 대한 개혁성을 뛴 합리적 사고로 노동계의 기대 속에 출발한 신생 노조이다. 한마디로 귀족 노조를 해산해야만 순진한 근로자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자세로 발족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왜 기득권을 가진 두 개의 노조가 쉴새 없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권력으로 군림했던 것인가? 아마도 찐한 맛을 즐기고 있는 일부 노조 간부들에게 밴 중독을 끊기에는 그들에겐 죽음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찐맛은 간부가 즐기고 희생과 최후의 죽음까지는 말단 근로자가 택하고 있다. 필자의 오래전 목격담을 하나 말하겠다. 행주산성 주변에 보신탕을 파는 음식점의 대낮에 노조 간부 몇몇이 모여 고스톱을 치면서, 보신탕과 술에 절어 주고받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나 이번에 철도 부지를 불하받아 차명으로 해놨다. 난 집도 전세로 살고 있다. 잘하는 짓이지 ㅎㅎ.” 마치 노동자를 위해 헌신하며 힘들게 살고 있다는 모습으로 지내야 국민들이 믿어준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식사하던 나의 귀에는 그들이 연극 준비를 위한 대사를 읊는 것으로 착각했었다. 이자들은 근로자를 대변하는
일상에 바빠 정치에 무덤덤한 일반국민들도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의 대한민국 현실이다. 이들이 과연 헌법이 보장하는 대한민국 국회의원인가 싶다. 한미 정상회담에 나섰던 윤대통령을 음해하기 위해 가짜뉴스는 물론이고, 정상적인 사실도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것이 일상이다. 온갖 불법비리로 수사를 받고 있는 당대표와 당내경선에서 돈 봉투를 남발했던 전 당대표의 만행으로 인한 위기로 정신줄을 놓았는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의 정신세계는 정상회복이 불가능해 보인다. 아테네의 중우정치(衆愚政治)와 직접민주주의 민주화란 미명아래 민주팔이 하면서 입만 열면 직접민주주의가 답이라 외쳐대던 좌익들의 거짓선동으로 한국사회는 언제부턴가 궤변의 ‘소피스트(sophist)’가 창궐했던 아테네 말기 희랍의 중우정치(衆愚政治) 상황과 흡사해졌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온갖 시빗거리를 모조리 투표로 결정하는 아테네의 정치관행은, 틈만 나면 뒷돈을 주고 표를 사서라도 저잣거리의 시민들을 끌어 모아 투표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조건 자신의 당파에 유리한 쪽으로 투표결과가 나오도록 수사학과 웅변술로 무장한 선전과 선동의 달인들을 대동했다. 그 결과 이재에 밝고 영혼의 격이 낮은 여러 형태
며칠 전의 일이다. 중학교에 다니는 손주 녀석으로부터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 “할아버지 우리나라는 두 개의 나라로 나눠진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맨 날 맨 날 무리를 지어 싸우는 모습을 보니, 철천지원수처럼 느껴져서 그래요.” 자기네들 세계에서는 싸우고 나서도 더 친밀해지는 관계로 지내는데, 아마도 어린애들의 눈에는 정치권의 여와 야의 형태가 마치 원수진 사람들이 하는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꼴사나운 모습은 그 밑바닥에 1945년 해방 후 신탁이냐, 반탁이냐와 또한 이승만이 건국 대통령이냐, 초대 대통령이냐로 시작된 해묵은 앙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간단한 해법을 놓고 어째서 더불어민주당은 보수정권에 대해서는 타협보다도 부정적 접근부터 하는지가 궁금하다. 6·25 동족상잔은 신탁과 반탁 편에 선 정치인들의 이해관계를 틈타 소련과 김일성의 합작으로 일으킨 남침 전쟁이었다. 건국 대통령이자 초대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의 손으로 선택한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기에 합법적 대한민국의 대통령임이 사필귀정이다. 다만 3·15 부정선거로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이를 자인한 이승만은 국민
지난 3월 사쿠라가 유난히 일찍 피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나라에서도 ‘죽창가’(竹槍歌)를 드높이 외쳐대는 무리가 있었다. 그 여운이 아직 가시지는 않았지만... ‘일제(日帝)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대위변제’ 해법 제시에 이어, ‘한일정상회담’(3월 16〜17일)이 열렸다. 후쿠시마 원전(原電) 오염수와 독도(獨島)에 관한 괴담·악담과 함께 그 황당한 ‘죽창가’는 왜국(倭國)을 당장 집어삼킬 듯했다. “연합훈련을 핑계로 자위대의 군홧발이 다시 한반도를 더럽히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굴욕적인 강제 동원 배상안이 강행된다면, 한-미-일 군사동맹이 기다리고 있다... 제2의 카스라-테프트 밀약이 생기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실제를 들여다보면, 그 ‘죽창’은 결코 왜국(倭國)을 겨누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왜국에다 대곤 제대로 주둥이질조차 하질 못했다. 이 나라 자해(自害)를 노린 내부 창(槍)질일 뿐이며, 국민의 분열을 노린 정치적 술수에 불과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 아니던가. 아울러 북녘 ‘백도혈통’(百盜血統)에게 크게 도움을 주는 짓거리라는 건 이미 검증된 사실(史實/事實)이다. 누군가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일련의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