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물주는 우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음(陰)과 양(陽)의 기운을 가지고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 곳에는 어김없이 분명한 기준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회전운동의 중심점이기도 하고, ‘어둠’과 ‘빛’이 순서를 바꾸는 변곡점이기도 하다. ▪ 멀리 갈 것도 없이, 1953년 6.25동란의 정전과 함께 한반도 또한 휴전선을 기준선으로 ‘어둠’과 ‘빛’의 기운으로 나뉘어 그 성질이 정해져 버렸다. 야속하기 짝이 없는 창조의 원리를 따라, 70여 년간 두 개의 기운이 ‘불편한 균형’을 유지해 오는 동안, 뚜렷해진 것이 있다면 어둠은 공산당의 나라 ‘북한’이고, 빛은 내나라 ‘대한민국’이었다는 사실이다. ▪ 상대적인 것들을 굳이 세분하여 호칭 안에 가둬놓고 싶어하는 이들은 이 경우의 ‘어둠’을 좌(左)라고 불렀고, ‘빛’은 우(右)라고 불러왔다. 빛의 세상에서 태어나 살아왔으면서 어쩌다 ‘그릇됨’을 의미하는 ‘좌’에 영혼을 팔아버린 인간들은 어느 순간부터 ‘진보(進步)’라는 단어를 가져다 뒤집어쓰려고 애써왔지만, 어차피 ‘올바름’의 대척점에 선 그들은 여전히 그릇된 어둠의 기운에서 자양분을 빨아당겨야 하는 습생 탓인지, 그들의 안구 밖으로 펼쳐진
요즘 우리 사회에서 그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많은 이들에게서 진정한 참회와 개과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일부 정치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환심의 교묘한 언사(言辭)와, 아첨의 안색을 하는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많은 사람으로부터의 일순모면(一瞬謀免)을 바란다. 일부의 정부 고위 공직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은폐하고, 시간과 함께 많은 사람으로부터의 기억상실을 기대한다. 기업의 소위 오너라는 일부의 대주주는, 사적인 탐욕추구에 주주 가치를 훼손하고도 그에 따른 손해에 대해 전혀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으로부터의 지위보전을 간구한다. 언제부터인지 이와 같이 우리 사회의 좀 잘난 사람에게서 참회와 개과를 찾기란 창해(滄海)에서 일속(一粟)을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되었다. 불교에서는 천수경의 참회게(懺悔偈)에 “예전부터 내가 지었던 모든 악업은, 모두가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는데, 몸과 입과 뜻을 따라 생겨난 것이므로, 나 이제 그 모든 죄업을 참회하옵니다.”라고 하면서 참회를 하고 개과를 다짐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범한 죄를 기억하고, 고백하고, 뉘우치고, 죄가 사해지기를 원하고, 다시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을 서
간혹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틀린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아주 빠르게 아무런 생각이 없이 가고 있는 경우가 있다. 탈무드에서는 “가는 속력보다 가는 방향”이라고 하였지만, 어느 시기부터 촛불혁명이라고 하면서도 올바른 공약은 없이 등장한 무리가, 나침반도 가지지 않은 채 가야 할 방향이라며 가기 싫은 국민들까지 몰아갔다. 그들은 국민을 위한 정책의 실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사익을 지키기 위한 것에 더 몰두하였다. 역사에서 사상과 가치관의 큰 혼동이 있었던 시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중에 실패한 사상과 가치관의 한 페이지가 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서, 혁명의 주체는 일반 노동자 계급으로 설정되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작인 그보다 더 하층 노동자 계급은 오히려 반혁명의 온상이 될 수 있는 존재로 경시되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바탕을 둔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은 스탈린을 거치면서 완수되었지만, 인민이 가야 할 방향은 제시하지 못한 채 독재로 치달으면서 가야 할 길을 잃어버렸다. 인민을 위한다는 핑계로 인민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공산주의는 후일 가야 할 방향을 잃고 민주주의에 그 자리를 내
배부르고 등 따스다면 상황(上皇)도 두렵지 않다. 이 말은 대한민국 국민만이 경험한 지난 60년대 70년대 우리들의 숨길 수 없는 역사의 한편이다. 배부르게 하는 것은 우리가 먹는 농수산물이다. 등 따습다는 비유는 에너지로 잠자는 구들방을 뜨끈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먹는 거는 자체 조달이 가능하지만, 에너지는 전량 수입으로 충당한다. 그런데 자급자족의 수산물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 처리수 방류에 대한 반대가 쉴 사이 없이 전국으로 확대하고 있다. 과학적 증거도 무시한 채 먹는 것 가지고 온 나라를 갈라치게 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정도가 진영논리로 넘어서는 이재명의 비리 수사를 덮으려 하는 벼랑끝 전술로 확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덩달아서 러시아·중국·북한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도 우리 정치권에 이념전쟁까지 불을 붙이고 있다. 그럼에도 정책정당으로의 본 모습을 망각한 더불어민주당 정말로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탄생한 전통 야당이 맞는가? 필자 30대 시절 김의택 전 민권당 총재와의 짧은 인연에서 배운 것이 생각난다. 정치는 야합이 아니라 정책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은 두 당(黨)에서 보여주는 이판사판보다도, 낮에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후 갑자기 인간의 이성이 종교가 되었다. 문명적으로 소외되었던 독일과 자격지심의 러시아로부터 창궐했던 좌익 사상가들의 인류사와 인간개조 노력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충우돌하다가 결국 소련이라는 공산전체주의로 귀착했다. 그러나 이 공산전체주의 제국도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역사속에서 내부모순으로 인해 멸망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역사적 흔적은 아직도 수많은 연구과제로 남아있으며, 민주주의의 한 기형으로 21세기에도 사상적 변이과정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도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모택동의 사상집들은 여전히 좌익지식인들의 서재에서 보물단지로 취급받고 있다. 필자는 공산주의 이념으로 이어졌던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 시대에 출판된 도스트옙스키의 소설 <악령>이 묘사하는 위선과 기만, 사기와 거짓에 기반한 반인륜적인 악마적 선택에는 별다른 의미를 두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혁명가 교리문답이 통용될 수 있었던, 지금으로부터 2백년전의 극단적인 이념대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첨단기술 시대인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창궐했던 소위 문재인 주사파 정권은 짐짓 이념적으로는 설명이 되질 않는데, 뭔가 희한한 이념의 기형아
수주대토(守株待兎)란... 자신의 좁은 식견만 믿고 아둔하게 구는 경우를 뜻하는 말이다. 지도자는 자신들의 결심에 기초하여 선거에서 제시한 공약을 정권의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시행해서는 안된다. 선거에서 재원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없이 득표만을 위해 제시된 섣부르기 짝이 없는 공약의 폐기는 간혹 있을 수 있지만, 가치가 있는 공약이라도 시행은 반드시 법과 절차를 거치고 민의를 수렴해야 한다. 그런데 지난 선거에서 간발의 득표율 차이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어떤 착각에 사로잡혀 안 될 일을 고집하는 우둔(愚鈍)의 수주대토(守株待兎)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된다. 또한 승자라도 법과 절차에 따라 민의를 수렴하는 과정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결심에 따라 정책을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투표에 숨어 있는 진의를 잊은 듯하다. 가치관이 다양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선거에서 제시된 어떤 공약이라 하더라도 국민의 동의를 바탕으로 시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공약의 시행을 위한 구체적인 이유 및 비용 대비 효과 등의 구체적인 수치의 제시 없이 지시 한마디로 공약이 선택적으로 집행되는 사례도 많은 것 같다. 마치 이전
지난 8월 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간 남아공에서 열린 제15차 브릭스 정상회담에 대해 일부 친중 언론에서는 시진핑의 승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이번 남아공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시진핑과 중국은 엄청난 돈을 뿌렸지만, 성과는 별로 없고, 오히려 세 가지 외교참사급 굴욕을 당했다. 브릭스(BRICS)는 2006년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외무장관이 당시 뉴욕 유엔총회에서 만나, 따로 회의를 하면서 시작된 고위급 회의였다. 2009년 이후,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고 인도와 브라질이 참여하면서, 4개국의 첫 글자를 따서 명명한 브릭(BRIC) 정상회담은 2010년 남아공 참여로 5개국의 브릭스가 되었다. 우한폐렴 클로벌 펜데믹 사태로 중단되었다가, 2019년 이후 4년 만에 열린 이번 15차 브릭스 정상회의는 두 가지 특징을 꼽을 수 있다. 첫 번째 특징은 브릭스의 외연 확대이다. 미국과 서방국에게 경제와 기술 등으로 각종 제재를 당하며 각기 포위되고 있는 시진핑과 푸틴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아르헨티나, 이집트, 에티오피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레이트 등 6개국을 추가로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브릭스는 2024년부터
최근 중국의 최신형 093급 상급(Shang-Type) 핵추진공격형잠수함이 연속해서 좌초되어 침몰했다는 소식이 퍼지고 있다. 지난 8월 22일부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좌초설에 이어서, 이번에는 함내 쿠데타로 침몰되었다는 소식까지 들리는데, 어떤 내용일까? 중국의 핵추진 공격형 잠수함은 세 가지 타입이 있다. 첫째는 091급(한급)이고, 둘째는 093급(상급)이며, 셋째는 현재 개발중에 있는 095급(수급)으로 구분한다. 095급은 개발중이라 알려진 자료가 없기 때문에 091급과 093급만 간단히 살펴보자. 091급(한급)은 1950년대초에 시작해서, 1958년 마오쩌둥이 개발 사업을 승인하고 1967년 건조되었지만, 성능 결함이 발생해서 실제 1번함인 장정1호가 취역한 것은 1974년으로 개발에 20년이 걸렸다. 이 091급(한급) 장정1호는 아시아 최초 자국산 핵추진공격형잠수함인데, 이후 1980년, 1984년, 1988년, 1991년 이렇게 장정 5호까지 총 5척이 취역했다. 하지만, 이 모델은 1950년대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되어 기계 결함, 방사능 차폐 성능 저하, 잠항 중 미사일 발사 불가 등 전투 능력도 제한적인데다가, 결정적인 것은 잠수함 생
지난 2008년의 일이다. 나도 속고 국민도 속은 미국산 소고기 파동을 기억하지 않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광우병이란 가짜뉴스를 퍼뜨려 갓 들어선 이명박 정권을 탈취하려는 의도는 마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사용하는 포플리즘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수법에서 나온 벤치마킹이다. 이러한 수법으로 또 한 번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일이 24일에 실시한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결정이다. 세계가 공인하는 IAEA 국제원자력 기구에서의 종합보고서엔 "사람의 건강과 해양 환경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인증과 한국 방사능계의 권위자 정병진 원자력공학과 교수의 증언도 무시한 채 국민만을 선동하는 집회야말로 사회주의 대국인 중국과 같은 내로남불의 비겁함을 보여주는 작태이다. 권위 있는 유튜브 WhyTimes(8/25)에서 ‘中 핵잠수함 대만해협서 침몰 과정(過程)’이란 뉴스를 보도했다. 사실이라면 이는 후쿠시마에 비할 바가 아닌 엄청난 바다의 재앙이 될 것이다. 왜 이러한 뉴스에 민주당과 좌파들은 우둔한 척할까? 초록은 동색이라서 그런가? 우리는 방사능 속에서 살고 있다. 그 농도가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인체에 심각성을 따진다고 한다. 이럴 때 YS 명언이 생각난다. 사람의 머리는
근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들고 끝내 아테네를 멸망시킨 희랍의 민주주의를 경멸했다. 또 희랍의 최고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민주정(民主政)을 우민정치(愚民政治)로 규정하고 경계했다. 그래서 중세이후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불러온 것이 바로 로마의 공화주의(共和主義)였다. 그러나 권력의 공공성과 권력분립을 강조하는 로마의 공화주의에는 귀족정, 군주정, 제정 등의 체제요인들이 잔존했다. 이런 고전적 공화주의와 달리, 피렌체의 철학자 마키아벨리는 군주를 대신하는 국가의 통치자로 등장한 시민들이 주관하는 시민적 공화주의(Civil Republicanism)를 최초로 발현시켜 근대로 향한 문을 열어젖혔다. 기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라는 세가지 정치체제가 혼합되어 있다. 근대의 산물인 개인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영국의 자유주의는 천년도 넘는 기원을 갖고 있다. 결국 자유민주주의는 영국의 자유주의가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한 몸으로 붙여나가는 기나긴 정치적 여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혁명을 통해서 또는 점진적 개혁을 통해서 왕이 권좌에서 사라지고, 군주 주권을 대신해 국민(People)이 국가의 주권자가 되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