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두툼한 책 한 권을 소개한다. 691쪽에 이른다. 그런데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책인데, 부제가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이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 소련 붕괴 후 독립한 이른바 탄(tan) 5개국들의 지역이다. 그레이트 게임은 이 지역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벌어진 대영제국과 러시아제국의 치열한 각축을 다루고 있다. 양은 많지만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이야기라 전혀 어렵지 않다. 사전 지식이 별로 없어도 된다. 수많은 인물들이 펼치는 인간 드라마로 읽어도 좋다. 야심가들, 그리고 스파이들이 등장하고 첩보공작에 갖가지 모험담이 더해진다. 그런가 하면 격렬한 전쟁도 나온다. 대하드라마다. 그런데 이 책은 생생한 실례를 기반으로 한 국제정치학적 교훈을 가득 담고 있다. 추상적인 논리가 아니라 살아서 작동하는 지정학의 현장을 볼 수 있다.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의 의지가 충돌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역사책이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방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딱딱하지 않아 마치 삼국지연의를 연상케 한다. 새로운 게임이 시작됐다는데
조선의 민낯을 말하다! “뭘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는 탓에 … 여자들은 뻔뻔스러우며 말이 매우 모질다. 조용하고 공손한 사람이 거의 없다.” “그들은 지독한 거짓말쟁이인데 … 거짓말을 해놓고 좋아 하기 때문에 아무리 조심해도 속아 넘어가고 만다.” “조선인들은 정말 돈을 좋아하며 돈을 손에 넣고자 할 때는 도적질도 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돈이 들어오면 아낄 줄도 모르고 계획도 없어서 대부분 먹는 데 써버린다. 조선인들은 미래라거나 계획성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세계 많은 나라를 다녀 봤지만 지구상에서 이 정도로 더러운 나라는 처음이다.” “그들은 참으로 깨끗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 비위생적이라거나 불결하다는 상상 가능한 모든 것들이 어디서나 널려 있다.” “조선의 양반들은 평민에게 가혹한 폭정을 가한다. 돈이 없으면 평민에게서 착취, 약탈, 불법구금을 하는데, 그런 것을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다. 관리나 수령 등 양반들은 논이나 집을 사고도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이것이 관습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침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남긴 기록이 아니다. 조선에 대해 동정과 애정을 아끼지 않았던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이다. 그것도 그 기록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흔한 고정관념 하나가 있다. 문화적으로는 언제나 한반도가 일본보다는 앞서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이래로 늘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전수되었으며, 중세 이래의 조선도 임진왜란을 당하고 말기에는 결국 국권을 빼앗겼지만 그래도 학문만큼은 일본에 앞서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컬어 조선은 선비의 나라,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 많은 한국인들에게 이 같은 대비는 단순한 비교문화사적 비교가 아니다. 조선은 지식인의 나라였지만 일본은 칼은 잘 쓰지만 어쨌든 조금은 무식한 칼잡이들의 나라였다는 인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일본은 옛날부터 독서광의 나라였다 오늘날의 일본인이 책을 많이 본다는 건 국제적으로도 꽤 유명하다. 일본의 독서열이 한국보다 높다는 건 한국인도 인정한다. 인구는 한국의 2.5배지만 서점 수는 한국의 8.7배인 나라가 일본이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종이 책 판매가 계속 줄고 있는 현상은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인구 대비 도서 판매율이 여전히 한국보다는 훨씬 높다. 현대 일본인은 확실히 한국인보다 독서를 더 열심히 한다. 그런데 현대 일본인만 그런 게 아니다. 일본인은 옛날에도 그랬다! 일본인의 독서열은
<아바타>와 <늑대와 춤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 Avatar>(2009)라는 영화가 있다. SF영화 즉 공상과학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사실 미국의 남북전쟁과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케빈 코스트너 감독·주연의 <늑대와 춤을 Dances with Wolves>(1990)이라는 영화의 SF버전이나 다름없다. 두 이야기는 모두 평화로운 미개인과 호전적이고 탐욕스러운 문명인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다루고 있다. 탐욕스러운 문명인이 침략하기 전까지 그들 착한 미개인들은 어떠한 다툼이나 갈등도 없이 평화롭게 잘 살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결말에는 차이가 있다. <늑대와 춤을>에선 그 착한 인디언들이 백인 침략자들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끝나고, <아바타>에선 판도라 행성의 착한 미개종족들이 문명인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두 이야기 모두 의미론적 차원에선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미개인은 선(善)이고 문명인은 악(惡)이라는 설정이다. 두 영화 모두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을 뿐 아니라 아카데미상도 휩쓸었다. 영화를 잘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런 설정에
호모 사피엔스 이번에는 인간을 침팬지와의 비교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자체로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인간의 생물학적 학명(學名)이다. 학명은 라틴어 또는 라틴어화한 낱말로 속명(屬名)과 종명(種名)을 순서대로 이어 쓰는 방식으로 표기한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도 라틴어로서, 속명 호모(Homo)는 인간, 종명 사피엔스(sapiens)는 지혜를 뜻한다. 그런데 학명은 정식으로는 속명 종명 다음에 명명자(命名者)의 이름을 붙이는 삼명법(三名法)이 원칙이다. 알파벳 표기법도 정해져 있다. 속명과 종명의 표기는 기울어진 서체를 사용하며 속명 첫 글자는 대문자로 나머지는 소문자로 한다. 그리고 명명자(命名者)의 이름은 첫 글자는 대문자로 하고 나머지는 소문자로 쓰되 기울지 않은 정자체로 쓴다. 이 원칙에 따른 인간 학명의 정식 표기는 Homo sapiens Linnæus이다. Linnæus는 명명자인 린네(Linné)의 이름을 라틴어 방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æ는 a와 e의 합성자로 라틴어식 표기에 사용된다.)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가
이 · 강 · 호 인간과 침팬지는 유사한 게 많다. 그러나 그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드러지게 다른 인간 특유의 행동양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교환이다. 대개의 모든 동물이 다 그렇듯 침팬지 세계도 속된 표현으로 힘센 놈이 임자다. 욕망의 충족은 그것이 먹이든 성적 기회든 힘의 서열에 따라 결정된다. 하지만 인간은 교환을 한다. 인간 세계에도 힘의 서열은 있지만 인간은 욕망의 충족을 힘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인간은 주고받는 교환행위를 통해 충돌을 회피하며 욕망충족의 기회를 확보하는 법을 안다. 독일의 인류학자 페터 푹스(Peter Fuchs)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에겐 비즈니스 유전자가 있다. 태초에 교환이 있었다 아니 달리 표현하면 교환이 바로 인간의 태초다. 인간은 어떤 계기로 교환이라는 행동양식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로써 다른 모든 유인원과 구별되는 유니크한 존재가 되었다. 교환을 위해선 상호성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창세기 에덴에서 선악과로 눈이 열린 것은 그 비유일 수 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물은 욕망의 존재다. 욕망은 생명력의 본성이며 존재의 권리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결코 선악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욕망의 추구는 당연히 충돌
이 · 강 · 호 이제 창세기 이야기와는 다른 각도에서 인간을 살펴보자. ‘신과 인간’ 사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가장 유사하다는 ‘침팬지와 인간’이라는 창을 통해서다. 침팬지와 인간, 두 영장류의 DNA는 98%까지 동일하다. 이 2%의 차이가 인간의 그 무엇일까? 그렇긴 하지만 수치상으론 좀 작아 보인다. 사실 인간은 다른 영장류와 지나치게 유사하다. 인간만의 특질로 보았던 많은 요소들이 침팬지 등 대형 유인원뿐만 아니라 그보다 덜 진화한 원숭이에서도 발견된다. “털 없는 원숭이”라니 영국 동물학자 데스몬드 모리스(Desmond Morris, 1928~)는 인간을 아예 “털 없는 원숭이”라고 했다. 영국 포유류 박물관 관장을 지내던 1967년, 그 같은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자극적 제목만큼이나 관심을 끌면서 세계적으로도 히트를 쳤다. 하지만 당시 반발도 좀 세게 일었다. 인간을 그저 ‘짐승’인 양 다루냐는 것일 터였다.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독특성이 “털이 있고 없고“에 있다 하면 좀 짓궂기는 하다. 인간이 스스로를 지나치게 특별하게 여기는 데 대해선 경계가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차이를 아는 게 곧바로 오만은 아니다. 유사해 보이는 존재와의 차이를
이 · 강 · 호 역사는 인간의 이야기다. 그래서 역사서의 첫 장은 인간의 기원에 관한 것인데 대부분의 경우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인류의 첫 조상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진정한 관심은 인간의 진화론적 연대기가 아니다. 인간 진화의 발자취는 역사이기보다는 생물학의 영역이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측면이 아니라 그 주역으로서의 인간의 어떤 면모다. 때로는 신화의 상징과 비유가 그 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구약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가 그런 경우다. 창세기는 서사의 첫 장에 어울리게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인간의 이야기는 창조의 여섯 번째 날부터 펼쳐진다. 에덴동산 이야기 신은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여 에덴동산에 살게 했는데 그들은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고 그 벌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이 · 강 · 호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 한때 (특히 서구문명에서) 인간의 정신활동의 정점에는 종교와 철학이 함께 했다. 물론 철학은 종종 종교를 비웃고, 종교는 더 자주 신앙이라는 형태로 철학과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종교는 철학을 폐기처분하기보다는 신학이라는 형태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쪽으로 나아갔다. 신학의 시대, 철학은 그 시녀가 됐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철학의 굴욕이 아니었다. 신학은 철학의 신성화였으며 신앙의 철학화였다. 철학은 신앙에 지팡이를 쥐어줘 폭주를 막고, 신앙은 철학에 신성한 망토를 걸치게 하여 통속화를 막고 있었다. 신학은 신앙과 철학의 긴장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이 제도와 체제가 된 종교의 ‘이데올로기’로 화하면서 위기가 왔다. 경건함을 잃고 성찰을 멈춘 도그마에 신앙은 신뢰를 상실하고 철학은 존경을 버렸다. 고삐를 잃은 신앙은 전투적 메시아니즘에 빠져들고, 답을 찾는 자들은 이제 신학 없는 철학을 향해갔다. 계몽주의는 그에 대한 답이었고, 신학은 그렇게 정신의 왕좌에서 밀려났다. 철학은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해방인 줄 알았다. 상실했던 고대의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한 번 정신의 왕좌로 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