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호의 이념과 역사] 역사를 보는 관점

- 신학과 철학이 신뢰와 존경 상실하자 인간정신활동의 왕좌, 과학이 차지
- 가치배제 불가능한 사회영역까지 장악한 과학, 유사종교로 둔갑
- 역사탐구는 과학적 법칙 아닌 철학의 영역인 가치 탐색

 

 

이 · 강 · 호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

 

한때 (특히 서구문명에서) 인간의 정신활동의 정점에는 종교와 철학이 함께 했다. 물론 철학은 종종 종교를 비웃고, 종교는 더 자주 신앙이라는 형태로 철학과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종교는 철학을 폐기처분하기보다는 신학이라는 형태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쪽으로 나아갔다. 신학의 시대, 철학은 그 시녀가 됐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철학의 굴욕이 아니었다. 신학은 철학의 신성화였으며 신앙의 철학화였다. 철학은 신앙에 지팡이를 쥐어줘 폭주를 막고, 신앙은 철학에 신성한 망토를 걸치게 하여 통속화를 막고 있었다.

 

신학은 신앙과 철학의 긴장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이 제도와 체제가 된 종교의 ‘이데올로기’로 화하면서 위기가 왔다. 경건함을 잃고 성찰을 멈춘 도그마에 신앙은 신뢰를 상실하고 철학은 존경을 버렸다. 고삐를 잃은 신앙은 전투적 메시아니즘에 빠져들고, 답을 찾는 자들은 이제 신학 없는 철학을 향해갔다.

 

계몽주의는 그에 대한 답이었고, 신학은 그렇게 정신의 왕좌에서 밀려났다. 철학은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해방인 줄 알았다. 상실했던 고대의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한 번 정신의 왕좌로 복귀하게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철학의 시대는 개막과 동시에 새로운 주인공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과학이었다.

 

 

과학주의라는 유사종교

 

신학이 밀려난 자리에 일단은 철학이 들어섰다. 그러나 철학은 곧 이어 자연철학에, 결국에는 과학에 차례로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핵심은 가치의 배제였다. 계몽주의는 신학을 추방하면서 가치도 함께 몰아냈다.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는 철학으로부터 종교에 대한 비웃음은 상속받았지만 가치는 물려받지 않았다. 그런 만큼 가치의 탐색과 추구를 본령으로 하는 철학도 계속 자리를 지킬 수는 없었다. 철학은 오직 가치를 배제한 자연철학이어야만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으며 그것은 결국 가치중립으로서의 과학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계몽주의 이래 오늘날에 이르면서 과학은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의 정점에 올라서게 되었다.

 

바야흐로 과학의 시대. 이제 권위를 행사하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여하히 ‘과학적’임을 내세울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을 빠뜨린 채 ‘진리’라는 단어를 섣부르게 앞세우다간 가차 없이 의심과 논박의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영역이 아니라도 그랬다. 사회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려면 우선 사회‘과학’부터 앞세워야 하고, 역사에 대해서도 ‘과학적 역사인식’을 들먹여줘야 말을 좀 섞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과학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라는 이름의 유사종교나 다름없다.

 

 

사회과학은 단지 참고일 뿐이다

 

사실 사회과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 아니다. 가장 과학적인 면모를 보이는 경제학조차 자연과학과 같은 과학일 수는 없다. 실험으로 검증할 수도 없으며, 인간의 삶이 계속되는 한 어떠한 결론도 항상 잠정적 추론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그 대상이 되는 인간이 가치와 의미를 배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유의미성은 본래 자임했듯이 가치배제라는 방법론에 있다. 과학은 사실을 다루는 것이지 가치와 의미의 영역을 다루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단순히 사실의 존재가 아니라 가치와 의미를 살아가는 존재다. 따라서 가치와 의미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다룬다는 건 애초부터 형용모순이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른바 사회과학적 관찰과 결론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참고자료 이상일 수 없다. 물론 인간을 “생존기계”로 보거나 가치와 의미를 단지 물질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유물론자의 입장에선 인간은 그냥 과학의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정확한 과학이 아니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한 비스마르크의 언명에 빗대 말하자면, 인간의 삶은 과학이기보다는 예술이다. 역사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발자취다.

 

 

역사탐구는 법칙이 아니라 가치의 탐색이다

 

과거와 현재는 인식의 대상이지만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는 인식 범위의 바깥에 있다. 그래서 미래는 미지(未知)의 영역이며 다만 추론해 볼 따름이다. 이러저러한 여러 입장에서 ‘역사법칙’이 논해져왔다. 하지만 역사법칙이란 과거의 경험에 입각해 현재의 수준에서 내리는 귀납적 결론이라는 한계 안에 있다. 역사가 앞으로도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른 귀납적 결론대로 전개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오류다.

 

물론 지난 역사의 경험에서 어떤 ‘패턴’을 찾는 것의 유효성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정적이고 유비적(類比的)이어야 한다. 그 한계를 벗어나면 이른바 ‘법칙’이라는 표현 자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그마’가 된다.

 

미래는 언제나 새로운 경험이다. 역사가 앞으로도 계속되는 것인 한 주장되는 ‘역사법칙’이란 어느 시점에서의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은 확언할 수 있는 역사의 법칙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변치 않는 속성 때문이다.

 

인간은 단순히 물리학적 생물학적 생존만을 유지해 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살아가는 존재다. 역사는 그렇게 의미를 살아가는 존재의 이야기다. 그리고 역사의 탐구는 시간의 지도를 따라가며 인간의 의미 추구의 흔적을 되짚어보는 가치의 탐색이다. 그래서 역사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철학의 영역이다.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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