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호의 이념과 역사] 태초에 교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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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환, 인간 특유의 행동 양식
- 교환 통해 욕망 충족의 기회 확보
- 인간에겐 비즈니스 유전자가 있다

 

 

이 · 강 · 호

 

인간과 침팬지는 유사한 게 많다. 그러나 그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드러지게 다른 인간 특유의 행동양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교환이다. 대개의 모든 동물이 다 그렇듯 침팬지 세계도 속된 표현으로 힘센 놈이 임자다. 욕망의 충족은 그것이 먹이든 성적 기회든 힘의 서열에 따라 결정된다.

 

하지만 인간은 교환을 한다. 인간 세계에도 힘의 서열은 있지만 인간은 욕망의 충족을 힘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인간은 주고받는 교환행위를 통해 충돌을 회피하며 욕망충족의 기회를 확보하는 법을 안다. 독일의 인류학자 페터 푹스(Peter Fuchs)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에겐 비즈니스 유전자가 있다.

 

태초에 교환이 있었다

 

아니 달리 표현하면 교환이 바로 인간의 태초다. 인간은 어떤 계기로 교환이라는 행동양식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로써 다른 모든 유인원과 구별되는 유니크한 존재가 되었다. 교환을 위해선 상호성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창세기 에덴에서 선악과로 눈이 열린 것은 그 비유일 수 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물은 욕망의 존재다. 욕망은 생명력의 본성이며 존재의 권리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결코 선악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욕망의 추구는 당연히 충돌을 낳는다. 이 욕망과 욕망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문제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반드시 봉착하는 기본적 과제다.

 

침팬지 사회 뿐 아니라 집단생활을 하는 모든 동물은 이를 서열로 해결한다. 그리고 이 서열은 투쟁으로 결정되는데 이 투쟁은 근본적으로 육체적 힘에 의해 결판이 난다. 힘겨루기를 하고 싸우고 그 승패에 따라 서열이 결정되고 그 서열을 통해 욕망의 질서를 만든다. 하지만 인간은 좀 다르다.

 

교환으로 욕망의 충돌을 해결

 

인간 사회에서도 서열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서열은 결코 육체적 힘만으로 결정되지도 않을뿐더러 서열만으로 욕망의 충돌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인간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것이 바로 교환이다.

 

욕망의 충돌을 해결하는 1차적 방식은 투쟁이다. 그런데 이 투쟁이 거듭되는 가운데 마침내 불이익의 회피라는 지점을 발견한다. 이익의 추구와 불이익의 회피는 욕망추구라는 동일한 실체의 양면이다. 이익의 추구가 욕망의 본능적 발현이라면 불이익의 회피는 본능을 넘어선 일종의 타산이다. 이 타산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계기다.

 

침팬지 사회는 폭력지수가 좀 높다. 인간사회의 100배 정도까지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이 수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침팬지 사회가 문제 해결을 일상화된 폭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은 관찰로도 확인된다. 인간이라는 ‘털 없는 원숭이’도 침팬지의 이웃답게 곧잘 힘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은 폭력만으로 갈등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현대사회만이 아니라 가장 원시적인 사회조차도 많은 갈등을 호혜적 교환으로 해결한다.

 

교환은 상호성을 전제로 한다

 

교환은 무엇보다도 상호성을 전제로 한다. 자아와 타자에 대한 자각이 동시적일 때 비로소 교환은 성립한다. 상호공동의 이익을 위한 교환! 이때부터는 확실히 인간이라는 호칭이 어울린다.

 

인간은 먼저 자기 집단 내부에서부터 교환의 지혜를 적용하는 것을 배우고 나아가 1차 집단을 넘어 새로운 집단과의 만남에서도 이 규칙을 적용했을 것이다. 다른 집단과의 만남은 일단은 약탈과 전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거듭되는 충돌이 야기하는 양 집단의 공통의 고통과 위기는 어느 순간 타협의 지점을 불러왔을 것이다.

 

물물교환을 했을 것이고 더러는 성적인 교환도 있었을 것이다. 씨족집단이 부족으로 발전한 것은 서로 성적인 교환 즉 혼인의 교환을 통해 항구적으로 상호위험을 회피하려는 시도가 출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략결혼 쯤 되겠는데, 문명화된 이후에도 결코 드물지 않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가장 오래된 초기 인류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특징적인 행동양식이다. 공통으로 직면한 위기 앞에서 충돌을 지속할 것인가 타협할 것인가에서 교환을 통한 타협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다른 영장류 집단을 구분 짓는 결정적 요소다. 인간은 교환을 선택함으로서 인간이 되었다.

 

 

물물교환에서 비롯되었을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교환행위가 바로 경제행위다. 교환행위가 재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거래라고 부르는데 쉬운 말로 ‘장사’다. 인간은 장사를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너무 익숙하고 흔해 전혀 특별한 느낌이 없고 별로 고상해 보이지도 않는 이 상행위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인간이 언제부터 상행위를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역사시대 이전부터 이미 물물교환이라는 거래를 했다는 점이다.

 

경제행위는 인간의 교환행위 중 가장 체계화되고 고도화된 것이다. 거기에는 상호성에 대한 자각, 자기 이익에 대한 타산, 공동 이익의 균형점에 대한 통찰 등 인간의 고도화된 정신활동이 모두 집약돼 있다. 상행위에는 어쩌면 문학의 뿌리였을지도 모를 달콤한 거래언어의 수사가 동원된다. 수학의 기원이 됐음직한 계산도 빠지지 않는다. 거래 기록의 필요가 문자를 낳았을 수도 있다. 문명이 상거래를 낳았을까 아니면 상거래가 문명을 낳았을까?

 

상(商)의 백안시는 망(亡)을 부른다

 

우리 역사에는 상행위를 천시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문화가 완강하게 이어지던 시대가 있었다.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구한말의 굴욕적인 몰락의 역사가 잘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도 본질적으로 상(商)을 백안시했다는 점에서 사농공상과 다르지 않았으며 그것을 따르던 사회주의 국가들은 당연히 무너졌다.

 

좌익적 발상의 두드러진 특징은 상행위를 불결하게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행위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며 호모사피엔스의 빛나는 자랑이다.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교환을 할 줄 아는 지혜가 문명을 낳았다. 상(商)의 반대편에 서면 나라가 망하고 문명도 몰락한다. 인간이 애써 얻은 지혜라는 인간의 인간다움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좌익이 아닌 분들 가운데도 장사를 좀 깔보는 언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장사꾼’ ‘장사치’라는 말로 어떤 인물 등의 속물성에 대한 경멸을 표하는 것이다. 지금 좌익적 주장과 그 무리들이 다시 활개를 치게 된 데는 그런 알량함도 자양분 노릇을 했다고 하면 지나친 과언(過言)일까?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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