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호의 교양나누기] 노컷 조선왕조실록

조선의 민낯을 말하다!

 

“뭘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는 탓에 … 여자들은 뻔뻔스러우며 말이 매우 모질다. 조용하고 공손한 사람이 거의 없다.”

 

“그들은 지독한 거짓말쟁이인데 … 거짓말을 해놓고 좋아 하기 때문에 아무리 조심해도 속아 넘어가고 만다.”

 

“조선인들은 정말 돈을 좋아하며 돈을 손에 넣고자 할 때는 도적질도 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돈이 들어오면 아낄 줄도 모르고 계획도 없어서 대부분 먹는 데 써버린다. 조선인들은 미래라거나 계획성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세계 많은 나라를 다녀 봤지만 지구상에서 이 정도로 더러운 나라는 처음이다.” “그들은 참으로 깨끗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 비위생적이라거나 불결하다는 상상 가능한 모든 것들이 어디서나 널려 있다.”

 

“조선의 양반들은 평민에게 가혹한 폭정을 가한다. 돈이 없으면 평민에게서 착취, 약탈, 불법구금을 하는데, 그런 것을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다. 관리나 수령 등 양반들은 논이나 집을 사고도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이것이 관습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침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남긴 기록이 아니다. 조선에 대해 동정과 애정을 아끼지 않았던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이다. 그것도 그 기록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것이 ‘조용한 아침의’ 어쩌고 하던 나라의 민낯이었다. <노컷 조선왕조실록>(2014, 김남 저, 어젠다)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비록 힘은 없지만 착하고 소박하게 잘 살고 있던 멀쩡한 나라를 집어먹은 것처럼 배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이 이미 다 망가져 나라라고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일본의 조선 ‘접수’는 마치 길바닥에 굴러다니던 빈 깡통을 주워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1907년 조선군이 해산될 때 조선 전체의 병력 수는 4천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나라를 집어 삼키지 못한다면 그게 바보였을 것이다.

 

말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500년 왕조가 말기에 이르다보니 그렇게 허물어진 것 아니겠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변호하고 싶지만 그전에도 그랬다.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이야말로 진실로 나라가 아닙니다. 날로 심하게 썩어 하루가 다르게 붕괴되어 가는 큰 집에 불과합니다.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너지는, 어느 대목도 손을 댈 수 없는 집입니다.”

 

이 피가 끓듯 한 토로는 임진왜란 18년 전인 1574년 율곡 이이가 조정에 올린 상소 <만언봉사 萬言封事>에 나오는 대목이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조정은 한양에서 급히 군대를 모았지만 다 도망쳐 버리고 동원 가능한 숫자는 겨우 300명이었다. 장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모두 서류상으로 그럴듯한 직책을 꿰차고 있을 뿐 작전을 이해하고 있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도 그랬듯이 “벼루로 성을 쌓고 붓을 창인 양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왕조 개창 2백년이 지나 기강이 해이해진 탓일 수도 있다. 당연히 그런 점 있고, 또 그런 탓으로 돌리고도 싶겠다. 그러나 그전에도 그랬다.

 

지금도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세종 때의 대마도 정벌의 경우를 보자. 1419년 세종 1년, 조선은 227척의 배에 1만 7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마도로 출병했다. 대마도에 도착한 조선군은 포구에 있던 작은 배들을 불사르고 또 마을을 불살랐다. 그리고 200명을 죽였다고 보고를 했다. 그러나 산으로 도망친 대마도 장정들의 야습으로 조선 군사도 역시 200명이 죽고 말았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조선 측의 기록이고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은 2천 명이 죽었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험준한 산에 진을 치고 야습을 하는 대마도 군을 더 이상 전혀 공략하지 못했다. 징집됐던 농민 출신 병사들이 가을걷이를 위해 돌아가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고 결국 조선군은 슬그머니 철병을 하고 말았다. 나중에 대마도에 파견됐다 돌아온 통사 최운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죽은 대마도 왜인은 20명이라고 했다. 대마도 정벌? 아군 전사를 왜인 기록대로 2천이 아니라 2백이라 해도 조선 측 전사가 왜군보다 10배다. 이게 이긴 전쟁인가?

 

“굶어 죽고 병들어 죽다 망한 나라”

 

먹고 사는 건 어땠을까? 나중에는 인구가 늘면서 식량 압박이 커졌겠지만 조선 초에는 그래도 괜찮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함길도는 지난해 흉년으로 민간에 먹을 것이 떨어져 집짐승을 다 잡아먹었으며, 5, 6월에는 기근이 더 심해져 떠돌며 빌어먹다가 산야나 골짜기와 시내에서 굶어죽은 자가 소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만 해도 4백에 이르며 살아 있는 자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실정입니다. … 병으로 죽었다 칭하는 자들도 대부분 굶어 죽은 자들입니다.”

 

조선말의 기록이 아니다. 못된 왕의 시절이 아니다. 태평성대라 칭하던 세종 25년 때인 1443년의 일이다. 이후로도 그래도 좋은 임금의 한 명으로 꼽히던 성종, 조광조가 활약하던 중종 시절 등등 끝없이 기근의 기록이 이어진다. 그런데 백성들이 굶주린 것은 단지 흉년으로 인한 기근 탓만도 아니었다. 중국의 사신을 맞아 진상을 하느라, 그리고 국상을 치르느라 국고를 소진하고 그것을 메우고자 흉년에도 세금을 줄이지도 못하고 백성을 쥐어짰던 게 기근을 더욱 부채질했다. 여기에 걸핏하면 전염병이 창궐해 또 수만 명씩 죽었다.

 

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죽고 병들어 죽는 시체 왕국”, 저자는 조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지냈다며 개탄하고 있다. 특히 현종(1641~1674) 때는 흉년이 거듭되어 끝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런데 이 현종 때, 조정은 죽은 왕을 위해 상복을 1년을 입느니 3년을 입느니 하는 ‘예송논쟁’으로 재위 15년 내내 날밤을 지새웠다.

 

이렇게 살아온 조선은 말기인 고종 때 이르자 그 사정이 더욱 처절해졌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하루에 한 끼를 먹는 게 전부였다. 당시 조선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은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조선 백성들과 똑같이 하루 한 끼 밖에 먹지 못해 그것이 큰 괴로움이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백성들은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외적이 쳐들어오면 위정자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던 나라, 그러면서 허례허식을 국가 최고의 가치관으로 삼고 공리공론으로 날밤을 지새우다 망한 나라” 이것이 조선에 대한 저자의 결론이다. 조선은 처음에도 그리고 임진왜란, 정묘 병자호란 전후에도 그리고 그 이후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늘 그렇게 살았다.

 

영정조 르네상스? 그런 건 없었다. 조선에서의 자본주의의 맹아? 턱도 없는 얘기다. 조선조말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어디에고, 심지어 한양마저 제대로 된 길조차 없었다. 길도 마차도 없어 운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나라에서 시장이 제대로 성장할 까닭이 없었다.

 

지금 TV 사극으로 그려지는 조선의 역사, 특히 왕실과 조정의 정치다툼 위주로 그려지는 조선의 역사는 어떤 점에선 가증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상도(商道)가 어쩌니 하면서 그려지는 조선의 경제생활도 사실상 판타지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은 훗날의 사회주의 국가와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양반사림들은 소련의 공산당원 노멘클라투라와 전혀 다르지 않았으며, 소련이 사회주의 농업 덕분에 내내 식량난에 시달렸듯이 조선도 처음부터 그랬다. 오늘날 그 꼴을 꼭 닮은 또 하나의 조선이 바로 북한이다. 북한 정권 패거리들은 스스로 자신을 ‘김씨 조선’이라 칭하고 있으니 참으로 잘 어울리는 칭호다.

 

조선은 왕조 역사 5백년을 자랑한다. 그러나 조선은 처음부터 내내 중국의 속국이었다. 그래도 독립은 유지하지 않았냐고? 처음에는 明나라에 그리고 이어서는 淸나라에 머리를 한껏 조아리고 때마다 공물을 바치고 처자들을 공녀로 갖다 바치는 나라, 중국 황제를 그토록 극진히 받들어 모시는 나라를 직접 점령하여 부담을 안아야 할 까닭이 있는가? 그런 식으로 유지한 껍데기만의 독립이 무슨 자랑거리인가?

 

부끄러운 역사지만 그게 실제 ‘무삭제 조선의 역사’다. 못난 몰골이다. 그러나 그래도 버릴 수 없는 우리의 역사다. 그것을 솔직하게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 얼마나 소중한 나라인지 더욱 더 뼈저리게 깨달을 수가 있다.

 

<노컷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김남은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전남대학교를 졸업했다. 신인문학상과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MBC KBS CBS 등에서 방송작가로 활약해왔다.

 

저자는 “해방 후 기술된 조선역사는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비판을 제거해 버리고 오직 자화자찬 일색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발견, 그 부끄러운 이면을 제대로 알기 전에는 국가의 기반이 허약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히고 있다. 용기 있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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