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호의 이념과 역사] 원시는 평화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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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와 <늑대와 춤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 Avatar>(2009)라는 영화가 있다. SF영화 즉 공상과학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사실 미국의 남북전쟁과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케빈 코스트너 감독·주연의 <늑대와 춤을 Dances with Wolves>(1990)이라는 영화의 SF버전이나 다름없다.

 

        

 

두 이야기는 모두 평화로운 미개인과 호전적이고 탐욕스러운 문명인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다루고 있다. 탐욕스러운 문명인이 침략하기 전까지 그들 착한 미개인들은 어떠한 다툼이나 갈등도 없이 평화롭게 잘 살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결말에는 차이가 있다. <늑대와 춤을>에선 그 착한 인디언들이 백인 침략자들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끝나고, <아바타>에선 판도라 행성의 착한 미개종족들이 문명인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두 이야기 모두 의미론적 차원에선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미개인은 선(善)이고 문명인은 악(惡)이라는 설정이다.

 

두 영화 모두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을 뿐 아니라 아카데미상도 휩쓸었다. 영화를 잘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런 설정에 대한 공감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점을 빠뜨릴 수 없다. 사람들은 시공간적으로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렇게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아득한 옛날 혹은 머나먼 다른 세계는 그처럼 착하고 평화로운 황금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대중들의 심리적 경향만은 아니다.

 

‘고귀한 야만인’이 있었을까?

 

근대 이후 서구 사조에는 프랑스 계몽주의사상가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를 필두로 그런 믿음이 하나의 강력한 흐름을 형성했다. 루소는 “인간의 욕구는 일부일처와 사유재산과 같은 부자유스러운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더 쉽고 평화롭게 충족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어떠한 폭력적 성향도 없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정반대의 주장도 있었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인간은 자연 상태에선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에 처하게 되며 오직 리바이어던(Leviathan)만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했다. 그러나 루소는 홉스의 입장에 반대하여,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고귀한 야만인’이었으며 문명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영원히 그런 황금기에 살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루소에게 있어서 문명은 타락이고 오염이었다. 그래서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아바타>와 <늑대와 춤을>의 관객들은, 그리고 그 영화에 상을 준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은 확실히 홉스보다는 루소에 더 많이 공감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과연 원시인 혹은 미개인은 착하고 평화스러우며 문명이 등장하면서 그런 평화가 깨진 것인가?

 

<원시전쟁>, 평화로운 원시인은 없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지적하는 책이 있다. <원시전쟁>(2014, 한국판)이라는 책이다. 원제는 <War Before Civilization : Myth of the Peaceful Savage>(1996), 저자는 미국의 고고학자 로렌스 H. 킬리(Lawrence H. Keeley)다. 1995년 미국 고고학협회에서 석기시대 연구상을 수상한 바 있는 고고학계의 권위자다.

 

 

그는 자신의 평생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로 얻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원시전쟁의 빈번함과 잔혹함을 보여주며 평화로운 원시의 모습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다. 저자는 선사시대의 유럽과 근대 유럽에서부터 세계 도처의 미개사회와 북아메리카의 인디언 부족사회에 이르기까지를 치밀하게 비교 검토하며, 원시시대야말로 현대보다도 전쟁이 훨씬 더 잦았으며, 더 잔인하고 치명적이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늑대와 춤을>과 <아바타>에서 나타난 인식은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시간이 지나고 거리가 멀어지면 향수로 변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그런 현상은 단지 현대의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Caesar)와 타키투스(Tacitus)의 게르만족에 대한 인식변화에서,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백인들의 호주 토착민 애보리진(Aborigine)에 대한 인식에서도 보인다고 지적한다.

 

 

 

좌익적 사조의 원시에 대한 환상

 

좌익적 사조, 특히 마르크스주의도 그런 루소적 계보의 연장이다. ‘역사의 진보’라는 것을 내세우지만 사실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적 정서는 ‘원시 공산제’라는 가설적 낙원에 대한 퇴행적 향수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와 그 아류들에서 ‘사적 소유와 국가’라는 문명의 발생은 그 낙원을 깨뜨린 죄악의 시작이며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그 문명’을 벗어나는 길 뿐이다. 그게 공산주의다!

 

그러나 <원시전쟁>에서 드러내고 있는 수많은 증거들은 그 같은 좌익적 믿음이 정치적 신화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다. 집단학살의 흔적이 역력한 수많은 고고학적 유적, 그리고 현대의 미개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은 문명 이전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인간이 그 같은 예측불허의 위태로움과 불확실성에서 벗어난 것은 질서와 제도라는 문명의 정치적 기재, 즉 국가가 등장하면서임을 담담히 지적한다.

 

 

그래도 문명이 낫다

 

문명이 등장한 이후에도 인류 역사에는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인류는 멀지않은 과거에 양차대전이라는 참혹한 대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문명이 원시적 야만보다는 더 넓은 범위의 더 많은 수의 인간들에게 생존과 안전의 확률을 높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인구가 이렇게 많은 것 아닌가?)

 

문명 그리고 국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시 하면서 오히려 그 고마움을 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21세기라는 이 지구문명의 시대에도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문명과 국가라는 제도의 혜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도처에는 아직도 최소한의 국가 만들기에도 성공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실패한 국가의 사례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 문명 그리고 그 문명의 정치적 기재로서의 국가는 당연한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더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지난하게 노력한 결과다.

 

 

이 강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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