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호의 교양나누기]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흔한 고정관념 하나가 있다. 문화적으로는 언제나 한반도가 일본보다는 앞서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이래로 늘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전수되었으며, 중세 이래의 조선도 임진왜란을 당하고 말기에는 결국 국권을 빼앗겼지만 그래도 학문만큼은 일본에 앞서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컬어 조선은 선비의 나라,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

 

많은 한국인들에게 이 같은 대비는 단순한 비교문화사적 비교가 아니다. 조선은 지식인의 나라였지만 일본은 칼은 잘 쓰지만 어쨌든 조금은 무식한 칼잡이들의 나라였다는 인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일본은 옛날부터 독서광의 나라였다

 

오늘날의 일본인이 책을 많이 본다는 건 국제적으로도 꽤 유명하다. 일본의 독서열이 한국보다 높다는 건 한국인도 인정한다. 인구는 한국의 2.5배지만 서점 수는 한국의 8.7배인 나라가 일본이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종이 책 판매가 계속 줄고 있는 현상은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인구 대비 도서 판매율이 여전히 한국보다는 훨씬 높다. 현대 일본인은 확실히 한국인보다 독서를 더 열심히 한다. 그런데 현대 일본인만 그런 게 아니다. 일본인은 옛날에도 그랬다!

 

일본인의 독서열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로 뒤늦게 발생한 습성이 아니다. 그 이전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이미 일본에는 상당한 독서 문화가 형성돼 있었다. 18세기 에도(지금의 도쿄)는 세계적인 대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인구가 100만이 넘었다. 그런데 그 성인 남성 인구의 대다수가 독서광이라고 할 만큼 책에 열중했다. 일본인 스스로의 자화자찬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과 무역을 하며 관찰할 기회를 가졌던 네덜란드인 등 서구인들의 평가가 그랬다.

 

단순히 말만의 평가가 아니다. 당시 서점․출판사의 수로도 그 점은 드러난다. “1620년대에는 교토에 서점․출판업자가 14곳이었는데, 그 뒤 에도와 오사카로 파급되어 1710년경에는 359개소로 늘어났고, 에도 시대 전반에 걸쳐 전국적으로 1140개의 서점이 있었다.”(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출판되는 책의 종류도 다양하여, “17세기 말의 한 서적상이 남긴 목록을 보면 당시 약 7,200여 종의 서적이 출판되었다.” (부길만 황지영, ‘동아시아 출판문화사 연구 I') 발행부수도 적지 않았다. 17세기에 이미 아무리 미미한 서적이라도 200~300부 정도씩은 찍었다. 베스트셀러도 등장했다. “베스트셀러가 되면 수천 부, 혹은 만 부 가까 증쇄되었다.” (같은 책)

 

19세기 초에는 상업적인 사설 도서관(도서 대여점)도 큼 붐을 이루어, 에도에만 600여개, 오사카에는 300여개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이들 도서 대여점에서 책을 빌려보곤 했다. 헌책 거래도 활발했다. 19세기 일본에는 출판사 서점 도서관 대여점 헌책방 등, ‘e-book'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도서․출판과 관련한 모든 게 다 있었다.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은 이미 출판대국 독서대국이었다.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이웃을 둔 조선은 어땠을까? 일본보다는 늘 문화적으로는 선진국이라 자부했으니 적어도 도서․출판 분야만큼은 일본 이상으로 아니 최소한 그에 빠지지 않는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유감스럽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조선은 간단히 말해 서점이 전혀 없는 나라였다. 처음부터 마지막 무렵까지 그랬다.

 

나라에서 책을 부족함 없이 충분히 나눠 줘서 그랬을까? 천만에! 조선은 내세우는바 숭문(崇文)의 나라답지 않게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가 책이 부족했다. 정부가 책의 공급을 책임 내지는 독점 하기는 했다. 책이 필요한 사대부들에게 나라에서 책을 찍어 조금씩 하사했다. 지방 관헌에서 향교 등에 조금씩 공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공급은 그 종류나 양 모두에서 턱없이 부족했다. 주자학 관련 도서가 거의 전부였으며 그나마도 풍족하게 공급하지 못했다.

 

책의 거래가 이루어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 거래는 그렇게 하사 공급받은 받은 책을 필요한 몇몇들이 사고파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부동산중개인 비슷한 서책쾌(書冊儈)라는 중개인이 나서서 중개를 하는 식이었다.

 

서점 설치에 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초부터 그런 논의는 있었다. 그러나 그 유명한 호학의 군주 세종도 그것을 강력히 추진하지는 않았다. 책은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이후로도 몇 차례 논의는 있었지만 명종 대를 끝으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서점 설치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다.

 

조선은 숭문의 나라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사실은 서적의 공급량이 턱 없이 부족했다. 이것은 서점이 등장할 수 없었던 원인이기도 했으며 또 그 결과이기도 했다. 인쇄․출판의 국가 독점은 민간 인쇄출판업의 발달을 막았고, 이 때문에 서적의 공급량은 언제나 국가의 재정 부담 정도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국가 재정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는 길게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상황이니 책의 공급은 결국 임금의 하사라는 생색에 의존했다. 오늘날의 북한식이라고 보면 딱 맞을 것이다. (사실 ‘이씨 조선’과 ‘김씨 조선’은 여러 가지로 판박이처럼 닮았다!)

 

조선은 유학에서도 일본에 뒤떨어졌다

 

조선시대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유학, 특히 주자학에 있어서만큼은 조선이 일본에 앞서 있었을 게 틀림없다고 믿는 경우가 일반적일 것이다. 조선 초로 한정한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일본의 유학 역사의 초기, 퇴계(退溪)의 영향은 매우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17세기 에도 시대 이후로는 상황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은 퇴계학의 충실한 계승자를 자처했으나 이후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1619~1682) ),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 등에 이르면 이미 완전히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기에 이른다. 일본 유학의 지평은 넓고도 깊었다. 주자학(朱子學)은 물론 양명학(陽明學)에서 고문사학(古文辭學)까지도 포괄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편으로는 국학(國學)이 또 다른 편에선 ‘미토학(水戸学)’이 형성됐다. 미토학의 국체론(國體論)은 훗날의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토대의 하나가 되었다.

 

일본과 조선의 운명의 교차는 19세기 서세동점의 시기에 빚어진 우연의 산물이 결코 아니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얼핏 ‘흑선의 도래’라는 외적 충격이 가져다 준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그 이전부터 ‘근대’가 강력하게 태동되고 준비돼 있었다. 그것이 흑선을 계기로 폭발해 나온 것이었다. 학문과 지식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지적 분야에서도 매우 밀도 있게 새로운 시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책을 정말 열심히 읽었다.

 

초판이 15만 부 나간 후쿠자와 유키치의 책, 본 사람이 없는 다산의 책

 

메이지 유신 직전인 1866년 나온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서양사정(西洋事情)>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초판 발행부수만 15만 부에 이르렀다. 후쿠자와는 훗날, 이래저래 나돌던 불법복제판까지 합하면 거의 25만 부 가량 팔렸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대단한 초유의 베스트셀러다. 초판 15만 부? 조선조 500년 내내 아니 마지막 끝나는 날까지 조선에는 그런 책은 없었다.

 

15만~25만 부! 그 책을 읽는 지식 독자층이 그만큼 충분히 존재했다는 뜻이다.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단순히 인쇄출판의 기술이 떨어진 탓이 아니었다. 주자학 그것도 과거(科擧) 시험용 주자학만 했다. 다른 것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일본의 유학자들은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승려 출신, 상인 출신들이 학문 자체에 뜻을 두고 ‘진짜 공부’를 했다. 사무라이층도 과거 공부가 아니라 진짜 공부를 하고 교양을 쌓고자 했다. 그것이 쌓여 1866년에 15만~25만 부의 책이 팔려나가는 기반이 됐다.

 

책은 그냥 쓰인 원고 그 상태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인쇄 출판되고 유통되어야 비로소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실학과 관련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그 저술들은 사회정치적으로는 조선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 본 사람이 없었다. 다산의 저서가 최초로 인쇄본이 된 때는 조선이 이미 망하고 없어진 일제시대인 1930년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필사를 해서 돌려본 몇몇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사회적 영향력’을 논할 순 없다.)

 

똑똑한 선비 지식인의 나라 조선, 무식한 사무라이 칼잡이의 나라 일본? 망상이고 판타지다! 조선은 일본보다 공부도 못했다. 요즘은 어떤가?

 

 

이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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