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우리가 마주한 시험에는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려있다. 사악한 세력은 우리가 항복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예부터 폭정에는 저항하고, 위협에는 용기로 맞서라고 가르쳤다. 요즘 같은 시기에 우리 국민들은 사기와 거짓에 대항하고, 진실의 편에 서서 단결해야 한다. 전체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를,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를, 악(惡)이 아닌 선(善)을 택하는 편 말이다. 2020년의 한국과 미국의 선거에 대한 부정 의혹이 계속 제기되고 있음에도 주류 언론들은 선거 관련 조사나 취재는 커녕 신빙성 있는 혐의와 증거를 보고도 "근거가 없다"는 보도를 한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번 4.15 선거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거짓말로 숨기며, 마지못한 공론화 시늉조차 세뇌를 노린 선전선동 같다. 게다가 빅테크 기업들은 중국에서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소통을 교묘하게 차단했다. 국민세금으로 돌아가는 정부기관들이 부정선거의 신빙성 있는 혐의와 증거를 검증하는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알 수 없는 세력에게 뒷덜미가 잡혀 있기 때문이라는 오해를 왜 사는 걸까? 도대체 왜 그런 부정·비리를 저질러도 그저 방관만 하고
문재인 정권은 이제 대한민국의 정부가 아닌 국폭을 일삼는 대한민국 일진들이다. 그런 문재인 일진들이 기어코 치명적인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무슨 한이 있어도 연내 공수처 출범시킨다. 안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걱정마라” 라고 했다. 오만한 권력과 자신들의 힘만 믿는 비열한 일진들이다. 국민이 반드시 그리고 단호히 심판해야 하고, 또 대다수 국민들은 이 권력에 귀가 따가운 휘슬과 함께 이미 옐로우카드를 들이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이 갈수록 더 나대고 있다. 한 번만 더 받으면 퇴장이라는 "룰" 따위는 염두에 없다. 오로지 "퇴장당할 때 당하더라도 그때까지는 그냥 밀어붙이겠다," 이 자세다. 눈에 보이는 숫자에만 현혹되어 지들이 만든 법을 뜯어 고쳐서라도, 불법으로 공수처를 출범시켜 윤석열을 수사하겠다는 것이다. 일진들 말을 안 듣는 놈들은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으름장이다. 나치의 정권친위대 '게슈타포'를 만들어 독재로 가겠다는 것이다. 이 교만하고 오만한 정권이 갈 곳은 단 한 곳 뿐이다. 과연 한 치 앞도 못 보는 어리석은 자들이로다. 권력에 취하나 술에 취하나 똑같다. 비틀거리며 해롱대다가, "괜찮아, 괜찮아" 주절대며 운전
의문투성이인 문재인 정권, 침묵하고, 말 바꾸고, 고위공직자 비리 통과, 북한 옹호, 늘어나는 국채… 사건에 연루만 되면 죽음으로 연결되는 당사자들… 정몽헌, 노무현, 노회찬, 박원순, 쉼터관리소장, 윤미향 재판판사, 그리고 이낙연 대표실 부실장.. 대체 앞으로 얼마다 더, 몇이나 자살(?)을 할지.. 무엇을 감추려고? 자유민주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이 과연 대한민국인지 북한인지.. 옳은 길로 가고 있다고 말하는 문재인, 김정은을 쫓아가는 것이 옳은 길인지, 독재체재를 따라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젠 이들이 하는 짓을 보면 어이가 없는 것은 물론 분노가 차오른다. 이렇게 국민을 상대로 속이고 있는 정부를,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독재정권을 향하고 있는 이 정권에 무관심하지 않도록 국민들은 깨어나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민주당은 절차대로, 법대로란 말을 잘 쓰고 있다. 이는 독재국가에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쓰는 말이다. 독재국가, 독재자 하니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독일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독재자 히틀러다. 박정희 대통령이 쿠테타로 대통령이 되었나? 아니다. 선거를 통해 김대중을 이기고 당선이 되었다. 유신체제 모두 법적 절차를
지금 검찰, 법원, 법무부 모두 추미애를 반대하고 있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도, 언론의 모든 논조도, 양심있는 지식인 사회도, 모두 반대하고 있는 가운데 민주당과 청와대는 정권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윤석렬을 기어이 쫓아내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국민의 뜻에 정확히 반하는 최악의 선택을 앞두고 그길을 가고 있는 추. 민, 청. 수많은 경고가 이어져도 마이웨이만 외치고 있는데... 역사가 증명 할 것이다. 저들이 오늘의 사태에 대해 반드시 심판받을 것임을.. 내일로 정해젔던 징계위원회가 다음주 10일(목)로 연기되었다. 검찰총장을 징계의결하고 대통령이 싸인하여 내쫓는다면 코로나가 무서운건지, 지금 현 대한민국이 가고 있는 길이 무서운건지 국민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코로나고 뭐고 국민들은 광장으로 뛰쳐나와 저들이 행했던 촛불보다 더 큰 횃불로라도 지금 정권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수십, 수백만 집회와 투쟁으로 문과 추를 끌어내야 한다. 이제 국민들은 이번 사태가 허울좋은 검찰개혁이라는 이름아래 '문재인 정권의 온갖 죄악에 검찰이 칼을 들이대니 수사를 못하게 하려는 검찰 죽이기 작전' 중이고 그 가운데 '온갖 불법과 부정한 방법을 동원한 대리
검찰의 필요는 사소한 좀도둑 잡는데 있지 않다. 정치권력의 불법과 행정권력의 수뢰와 같은 쎈놈들의 비리를 색출하는데 있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는 더 큰 응원을 받아야한다. "열심히 하고 있는 검찰총장 내쫓았지 않습니까?"라며 총리를 질타했던 2013년 추미애 의원은 옳았다. "결국 끝내 독하게 매듭을 짓는군요. 무섭습니다"라며 트윗했던 문재인 의원은 정의로웠다. 그해 박근혜정권은 윤석렬 검사에게 정권에 충성하지 않은 죄를 물었다. 권력에게 검찰은 언제나 불편한 존재다. 그들의 불편은 국민에겐 위안이다.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국민에겐 공포로 다가온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었지만 윤석렬총장에 대한 직무정지명령은 불법하다. 또다시 정권에 충성하지 않은 죄를 묻고 있을 뿐이다. 울산시장선거개입사건에서 시작되어 월성1호기 불법정지사건수사의 칼끝이 권력을 향할 듯하니, 깡패처럼 덤벼드는 모양새다. 이런 일은 적폐를 일소하겠다며 윤석렬검사를 중앙지검장에 임명해서 3년간 지난 정권을 쑥대밭 만든 후에 벌어졌다. 조국 부부 이후, 황운하, 최강욱 등 수사대상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을 국회의원으로 공천할 때부터, 권력은 이미 검찰을 적으로 삼았다. 엄정한 수사를 보장해야
혁명(革命)은 그렇다. 장애물이 있다면 넘고 부숴서라도 전진(前進)해야 필자는 북한인권운동, 反金 왕조 혁명운동에 매진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고 가슴 아픈 사연을 월간조선(月刊朝鮮)이라는 언론을 통해 기고한 바 있었다. (2019년 6월 ~ 2020년 6월 총 10회 기고) 열 번에 걸쳐 장문의 내용으로 쓴 기고였기에, 다양한 일화와 사건사고·주장 등이 게재가 되었으니, 북한내부의 저항세력이 어떤 실천과 고뇌가 있었는지 살펴보는데 나름 의미있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특별한 계기를 통해 ‘대한민국·자유·독자’라는 모토로 창간하게 된 리베르타스(LIBERTAS) 인터넷 신문이 출발하였다. 앞으로 다양한 독자분들을 만나 스스로 간직해온 ‘잊지 못할 추억’들을 게재할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는 즈음, 다시 한번 북한의 아우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잊지 못할 첫 번째 시리즈로 북한의 아우를 소개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이고 속보이는 자기욕심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었을지 아니면 정치범수용소에서 구원의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수인(囚人)일지,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조차 생사를 알지 못하는 비극의 상황에서 모든 것이
이 · 강 · 호 역사는 인간의 이야기다. 그래서 역사서의 첫 장은 인간의 기원에 관한 것인데 대부분의 경우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인류의 첫 조상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진정한 관심은 인간의 진화론적 연대기가 아니다. 인간 진화의 발자취는 역사이기보다는 생물학의 영역이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측면이 아니라 그 주역으로서의 인간의 어떤 면모다. 때로는 신화의 상징과 비유가 그 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구약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가 그런 경우다. 창세기는 서사의 첫 장에 어울리게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인간의 이야기는 창조의 여섯 번째 날부터 펼쳐진다. 에덴동산 이야기 신은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여 에덴동산에 살게 했는데 그들은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고 그 벌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이 · 강 · 호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 한때 (특히 서구문명에서) 인간의 정신활동의 정점에는 종교와 철학이 함께 했다. 물론 철학은 종종 종교를 비웃고, 종교는 더 자주 신앙이라는 형태로 철학과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종교는 철학을 폐기처분하기보다는 신학이라는 형태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쪽으로 나아갔다. 신학의 시대, 철학은 그 시녀가 됐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철학의 굴욕이 아니었다. 신학은 철학의 신성화였으며 신앙의 철학화였다. 철학은 신앙에 지팡이를 쥐어줘 폭주를 막고, 신앙은 철학에 신성한 망토를 걸치게 하여 통속화를 막고 있었다. 신학은 신앙과 철학의 긴장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이 제도와 체제가 된 종교의 ‘이데올로기’로 화하면서 위기가 왔다. 경건함을 잃고 성찰을 멈춘 도그마에 신앙은 신뢰를 상실하고 철학은 존경을 버렸다. 고삐를 잃은 신앙은 전투적 메시아니즘에 빠져들고, 답을 찾는 자들은 이제 신학 없는 철학을 향해갔다. 계몽주의는 그에 대한 답이었고, 신학은 그렇게 정신의 왕좌에서 밀려났다. 철학은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해방인 줄 알았다. 상실했던 고대의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한 번 정신의 왕좌로 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