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칼럼] 1·4후퇴... 이승만과 리지웨이

- 중공군 실체 파악 실패한 유엔군, 막대한 전력 손실
- 지략가 리지웨이도 인해전술 앞 패닉, 1.4후퇴 단행
- 75세 이승만, 강추위 불구 군부대 돌며 눈물로 결전 호소
- 끝내 두 달 뒤 서울 수복도 리지웨이가 책임져

 

남 · 정 · 옥

 

  1·4후퇴는 1951년 1월 4일 중공군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이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철수한 것을 말한다.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해가 질 무렵 38선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에게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중공군의 본격적인 공세는 1951년 1월 1일 새해 첫날인 신정(新正) 때부터 이뤄졌다. 이런 까닭으로 중공군 3차 공세를 ‘신정공세’라고 한다.

 

  그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1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 2차공세의 여파로 인해 서부전선의 미8군과 국군2군단은 국군 3군단과 함께 임진강-연천-가평-춘천을 연하는 선에서 전선을 정비하고 있었고, 흥남에서 철수한 국군1군단은 삼척에 상륙하여 강릉 일대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흥남에서 뒤늦게 철수한 미10군단의 3개 사단은 부산에 상륙한 뒤 마산과 경주 및 포항일대에서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1·4후퇴를 빚게 한 중공군 3차 공세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대한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났다. 중공군은 대규모 병력을 앞세워 야간에 피리와 나팔 그리고 꽹과리를 두들기고 함성을 지르며 벌떼처럼 공격해왔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1·2차 공세를 통해 막대한 인명 및 장비손실을 입었다. 국군2군단이 붕괴되고, 미군 5개 사단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국군과 미군 모두 재편성과 정비가 필요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50년 7월 13일부터 한국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지상군을 총지휘하면서 7월의 지연전과 8~9월의 낙동강방어, 38선 돌파 및 북진작전을 지휘했던 워커(Walton H. Walker) 미8군사령관이 교통사고로 12월 23일 순직했다. 미8군사령부가 있는 서울, 유엔군사령부가 있는 일본 도쿄, 그리고 펜타곤이 있는 워싱턴은 워커의 죽음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책 마련이 필요했다. 워싱턴에서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요청에 따라 미 육군참모차장이던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중장을 후임 사령관에 신속히 임명했다. 2차대전시 유럽전선에서 공수부대 사단장과 군단장으로서 아이젠하워 연합군사령관의 신뢰를 받으며 용맹을 떨쳤던 리지웨이 장군은 명석한 두뇌를 소유한 지략가이자 공격형 지휘관이었다. 그는 뛰어난 지장(智將)이면서 용장(勇將)이었던 셈이다.

 

  워커 장군의 갑작스런 죽음과 임박한 중공군 공세로 혼란에 빠졌던 한국전선의 국군과 유엔군 수뇌부는 공수복장에 양쪽 가슴에 수류탄을 매달고 나타난 리지웨이 장군의 자신감 있는 모습에 매료됐다. 또 중공군 1,2차 공세를 통해 야간에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신출귀몰한 중공군의 전술’에 대해 전략적, 전술적으로 대처하는 리지웨이 장군의 신중하면서도 사려 깊은 리더십은 워싱턴과 도쿄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군 수뇌부에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중공군은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업무파악이 안되어 있을 신임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번에 전쟁을 공산군의 승리로 끝낼 심산이었다. 1950년 한해도 다 저물어가는 12월 31일 야간에 중공군과 북한군은 수도 서울과 원주지역을 향해 해일(海溢)처럼 밀어닥쳤다. 수도 서울의 북방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1사단과 미24사단에 각각 중공군 3개 사단이 공격해 왔다. 중과부적이었다. 끊임없이 쏘고 또 쏘아도 중공군은 마치 해변으로 몰려드는 거센 파도처럼 공격해 왔다.

 

  리지웨이는 12월 26일 도쿄에 도착하여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을 만나고, 다음날 대구에 도착한 후 바로 서울로 올라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에 머물기 위해 왔다”며 신고했다. 상황이 악화되면 유엔군이 일본으로 철수할 것이라는 말이 나돌 때였다. 리지웨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런 걱정을 없애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골라 했다. 그리고 예하 지휘관 및 참모들에게 후퇴를 거론하지 말도록 엄명했다. 자신은 최전선부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천막으로 만든 지휘소를 설치하고 한반도의 추운 겨울을 야전침대와 난로에 의지하며 보냈다.

 

  리지웨이가 한국에 부임하기 전부터 서울 천도 및 피난문제가 이미 미군 수뇌부에서 거론됐다. 워싱턴에서는 한국정부의 해외망명정부까지도 거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피난 및 천도 문제는 중공군 2차 공세에 의해 1950년 12월 4일 평양을 포기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뒤늦게 한국전선에 뛰어든 리지웨이 장군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지략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운 리지웨이라도 중공군의 인해전술 앞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100만명의 서울시민과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정부의 각료들이 버젓이 있는 수도 서울에서 군사적 결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한강을 등지고 적의 대군(大軍)과 사생결단으로 싸운다는 것은 현명한 지휘관이 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서울 북방에서 싸우고 있는 부대들은 해일처럼 밀려드는 중공군의 공격에 점차 패닉(panic)상태에 빠졌다.

 

  리지웨이는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국군이 후퇴하지 못하도록 정신교육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통령은 이 일에 기꺼이 나섰다.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이승만 대통령은 영하의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난방장치가 없는 경비행기와 덮개 없는 지프차를 타고 의정부, 춘천, 원주 등 국군부대를 찾아가 용감히 싸워 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때마다 대통령과 국군장병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부터 국군은 확연히 달라졌다. 하지만 시간은 중공군 편이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북진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국군으로서는 능력의 한계가 있었다. 전선은 국군의 강인한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 남쪽으로 밀려났다. 서울이 적의 공격권에 들어왔다.

 

  리지웨이는 군사적 결정을 내려야 했다. 1951년 1월 3일 서울에서 철수명령을 하달했다. 서울시민을 비롯하여 서울이북의 주민들 그리고 북한에서 온 피난민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은 1월 3일 오후 3시까지 한강을 건널 것을 명령했다. 그 이후는 병력과 장비가 한강에 놓인 부교를 통해 철수하기로 했다. 군의 입장을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보고하고 협조를 구했다. 이승만은 그럴 수 없다며 버텼으나 어쩔 수 없었다. 피난민 120만명이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통해 빠져 나갔다. 군 수뇌부와 리지웨이 장군은 그것을 비통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영하의 매서운 바람이 빨갛게 얼어붙은 피난민들의 얼굴을 때리는 가운데 수십만의 인파가 얼음 위에서 달리고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갓난아이를 안은 여자, 몸이 불편하고 연로한 부모를 등에 업고 가는 남자, 무거운 가재도구를 허리가 휘도록 지고 가는 사람, 리어카에 어린애들과 물건을 잔뜩 싣고 끌고 가는 사람, 그 사이로 가끔 네 다리를 쭉 뻗고 얼음위에 쓰려져 있는 황소를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행렬 속에는 아무도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눈 위를 걷는 신발소리, 힘에 겨워 깊이 내쉬는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걷고 있었다.

 

 

  군인들의 철수는 1월 4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서울시민과 군인들이 떠나버린 수도 서울은 이윽고 공산군이 들어왔다. 서울이 세 번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남침 이후인 6월 28일 북한군에 의해, 그리고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에 이어 수도 서울이 다시 공산군에 넘어갔다. 하지만 상황은 6월 28일과 달랐다. 그때는 힘이 없어 빼앗겼지만 1·4후퇴는 군사상 전략적 후퇴였다.

 

  서울에서의 결전은 대한민국 국민과 정부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에게 피해를 더 많이 주는 싸움이었다. 37선으로 물러난 리지웨이는 이후 대반격을 통해 중공군에게 철퇴를 가하기 시작했다. 2개월 후인 1951년 3월 15일 수도 서울을 다시 탈환했다. 서울을 내 준 것도 그였지만 서울을 되찾는 것도 그였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지휘관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리지웨이 장군에게 태극무공훈장으로 보답했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도서연구실장 / 문학박사>

핫 뉴스 & 이슈

유럽 전역에서 '공자학원'에 대한 논란 증폭
스페인 세비야대학교에서 공자학원 설립을 축하하는 현판식이 열린 가운데, 대학 내 일부 교수와 연구 조수가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중국당국이 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공자학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유럽 전역에서 관련 논란이 점점 더 증폭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자학원은 중국어 교육과 중국 문화의 전파를 목적으로 하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이를 중국의 세계관을 확산하고, 학자와 학생을 감시하는 등의 국가 안보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130개의 공자학원이 문을 닫았으며, 그 중 많은 수가 유럽에 위치해 있었다. 세비야대에서의 항의는 이러한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커뮤니케이션학부의 레라 부교수와 연구 조수 라미레스가 플래카드를 들고 연단에 서면서 보안 요원들에 의해 퇴진 요청을 받았다. 라일라 교수는 학교 측이 공자학원 개설 사실을 직원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이를 추진했다고 비판하며, 공자학원이 민감한 정치 현안에 대한 검열과 교수진 채용 시의 공갈 및 차별 등의 문제를 야기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은 스페인 내에서도 공자학원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페인은 현재 9개의 공자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