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 정 · 옥 1·4후퇴는 1951년 1월 4일 중공군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이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철수한 것을 말한다.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해가 질 무렵 38선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에게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중공군의 본격적인 공세는 1951년 1월 1일 새해 첫날인 신정(新正) 때부터 이뤄졌다. 이런 까닭으로 중공군 3차 공세를 ‘신정공세’라고 한다. 그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1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 2차공세의 여파로 인해 서부전선의 미8군과 국군2군단은 국군 3군단과 함께 임진강-연천-가평-춘천을 연하는 선에서 전선을 정비하고 있었고, 흥남에서 철수한 국군1군단은 삼척에 상륙하여 강릉 일대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흥남에서 뒤늦게 철수한 미10군단의 3개 사단은 부산에 상륙한 뒤 마산과 경주 및 포항일대에서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1·4후퇴를 빚게 한 중공군 3차 공세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대한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났다. 중공군은 대규모 병력을 앞세워 야간에 피리와 나팔 그리고 꽹과리를 두들기고 함성을 지르며 벌떼처럼
남 · 정 · 옥 중국의 6·25전쟁 70주년 행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70주년 기념행사 연설을 통해 중공군의 참전 이유를 “제국주의 침략이 확장되는 것을 막고 신중국의 안전을 지키고, 중국 인민의 평화로운 생활을 보위하기 위함”이라고 밝히며, ‘항미원조전쟁’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 ‘평화의 승리’, ‘인민의 승리’라며 자화자찬했다. 여기에 중국 당국도 거들고 나섰다. 6·25전쟁 때 중공군의 출발기지였던 단둥(丹東)의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紀念館)을 기존보다 4배로 확장해 그들의 한국전 참전 이유를 ‘뻔뻔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중공군의 6·25전쟁 개입은 통일을 앞둔 우리 국민과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웠던 유엔군에게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중국과 소련의 강력한 지원과 후원 하에 북한이 일으킨 남침으로 대한민국의 운명은 그야말로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신세가 됐다. 전 국토의 10%밖에 안 되는 경상도 일부의 조그마한 지역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어린아이와 노인만 빼고 전 국민이 동원되어 총력전을 펼쳤다. ‘낙동강 사수(死守)’였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는 시산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