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희생 막으려 끝까지 싸운 산타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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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빚 때문에 성매매 처한 소녀들에 창문너머 돈가방 던져
- "유황·불 지옥" 설교, 매춘굴된 이교도 신전 무너뜨려
- 동· 서 로마, 교회 분열 야기시킨 이단학자엔 따귀까지
- 진짜 산타클로스 선물, 장난감 아닌 영혼 구원!

산타 할아버지는 어쩌다가 우리들 몰래 양말 속에 선물을 두고 가셨을까? 

 

너무나 아름다운 그 마법같은 크리스마스 스토리가 사실이라면...  놀랍게도 이를 역사라고 주장하는 동방정교의 전통을 기반으로, 동화같은 얘기가 나와 소개한다. 대체 어떤 사연일까? 

 

지난 10일 미 「월드트리뷴 라이프」지에 크리스마스 특집인 "몰래 다녀가는 선물전달자, 성 니콜라스, 아동 희생과 이교도 음란과 끝까지 싸웠다"는 Bill Federer의 근사한 칼럼이 실렸다. 내용이 너무 길어 간추려서 소개한다.   

 

 

 

"86년 그분을 섬겼으나, 저를 선대(善對)치 않으신 일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나의 왕 되신 구주 예수님을 어찌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AD 155년, 그의 신앙을 부정하지 않으면 죽이라고 명한 로마 재판관 앞에 서서,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늙은 폴리카르포스는 이렇게 맹세했다. (이후 화형으로 순교함. 기자주*)

 

초기 기독교 300년간, 교회는 수도 없이 혹독한 세속권력의 박해를 받았다. 3세기말 가장 탄압받던 교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성 니콜라스다.

 

카톨릭의 성 베드로처럼, 그리스정교(동방정교) 최고의 성인(聖人)은 성 니콜라스다. 아일랜드의 성 패트릭이나 독일의 성 보니파시오(위니프레드)처럼, 그는 그리스 신도들과 후에 러시아 신도들 사이에서까지 가장 추앙받는 성직자가 된다.

 

 

 

그리스 정교회 전통에 따르면, 성 니콜라스는 AD 280년경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파타라(리키아)에 살던 부유한 노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역병으로 돌아가신 뒤 유산을 물려받은 니콜라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했다. 익명으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었던 것이다.

 

이 무렵, 3세기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신실한 사람들이 자신의 돈과 소유물을 전부 나눠준 다음, 은둔자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거나 수도생활을 위해 속세를 등지는 경건주의 운동이 퍼져있었다.  

 

 

 

니콜라스의 생애 가운데 이 시기에 있었던 주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는, 그가 살던 마을의 한 상인이 파산했을 때다. 빚쟁이들은 그 상인의 집과 재산 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끌고 가겠다고 위협했다.

 

상인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아이들이 끌려가면 분명 강제결혼이나 성매매, 매춘이라는 끔찍한 삶에 내던져지리라는 사실을 이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상인은 빚쟁이들이 딸들을 데려갈 수 없도록 서둘러 결혼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에게는 지참금을 마련할 돈이 없었다. 그쪽 세상에서는 법적으로 인정받는 혼인을 위해 꼭 필요했다.

 

상인의 딱한 소식을 들은 니콜라스가 어느 늦은 밤, 창문너머로 첫째 딸의 지참금이 될 만큼 돈이 든 가방을 던져주었다. 어쩌면 이 돈가방은 벽난로 옆에서 뽀송하게 말라가던 신발이나 스타킹(양말) 속으로 떨어졌을지 모르겠다. 큰딸이 결혼할 수 있게 되자 이 얘기는 장안의 화제가 됐다.

 

그리고나서 니콜라스는 둘째 딸을 위해서도 창문으로 돈가방을 던져주었고, 그녀 역시 결혼할 수 있게 됐다. 셋째 딸에게 줄 돈을 기대하며 상인은 기다렸다. 니콜라스가 돈을 던져 넣는 순간, 이 아버지는 밖으로 뛰어나가 그를 붙잡았다.

 

니콜라스는 그에게서 돈이 어디서 났는지 발설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하나님께로만 공을 돌리고 싶었다. AD 343년 12월 6일 소천한 성 니콜라스의 기일이면, 아이들 몰래 한밤중에 선물을 놔두고 벽난로 옆에 스타킹을 매다는 기원은 이 스토리에서 비롯됐다.

 

니콜라스가 집안으로 던져준 세개의 돈가방은, 전당포 바깥에다 세개의 금색공을 매달아 기념하고 있다. 이는 금전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처한 식구들을 이걸로 구해 냈음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전당포 주인들의 "수호성인"이 됐다.

 

 

 

니콜라스는 가진 돈을 모두 내준 다음, 성지 순례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성지에 도착한 그는 인적이 드문 시온 수도원으로 들어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지막 서약 직전, 어찌된 일인지 주께서는 그에게 "착한 행실을 숨기지 말라"는 감동을 주셨다. 그는 소아시아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지만, 예수님이 태어나신 장소를 직접 돌아보기 전까지는 아니었다.

 

 

마크 트웨인은 예수탄생기념성당 방문기인 그의 책 “시골뜨기 세계 여행기(1869)”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세계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이 맨 처음 울려 퍼지기 시작한 곳이 바로 여기다. 그리고 이곳에서 추운 겨울 아침이면 어김없이 머나먼 나라에서 이글거리는 화롯불 옆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아이들에게 영원무궁토록 기쁨을 주고 또 주기 위해, 어린 시절 나의 친구 산타클로스는 그의 첫 여행을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소아시아의 남해안에 위치한 번화한 지중해 항구도시 「뮈라」로 돌아왔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뮈라에서 활동하던 주교가 사망했다. 그러자 교회 지도자들은 누가 차기 주교가 되어야 할지 정할 수가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이튿날 교회에 나오는 첫번째 인물의 이름은 "니콜라스"이며 그가 차기 주교라는 것이었다.

 

평소 습관대로, 니콜라스는 밤새 금식을 하고 다음날 교회를 찾아간 첫번째 사람이 됐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에게 꿈 얘기를 들려주며 그가 차기 주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니콜라스는 주저했다. 당시는 로마 황제가 주교들을 잡아서 처형시키던 시기였다.

 

그는 결국 받아들였고, 뮈라의 주교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하던 시기, 니콜라스는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초기 기독교 300년 역사상 10대 박해 사건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가 최악이었다. AD 305년 5월 1일, 돌연 이 악독한 황제는 왕위에서 물러나야 할 만큼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장(腸) 질환에 걸렸다.

 

그 뒤를 이은 갈레리우스 황제 역시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 그러나 그도 속병에 걸려 AD 311년 사망했다.

 

황제가 사라진 로마 제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4명의 장군들이 누가 차기 황제가 될 것인지를 놓고 결판이 날때까지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 전갈을 받았을 때, 콘스탄티누스 장군은 영국 요크에 있었다. 부하들은 그를 둘러싸고 "시저 만세!”를 외쳤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 장군과 싸우기 위해 로마를 향해 행진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AD 312년 10월 28일 밀비아 다리 전투 바로 전날,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표시를 봤다고 한다.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그리스식 이름 “Χριστός”의 첫 두 글자였다.

 

첫번째 글자 “X”는 "영어로 “Chi”, 두 번째 글자 “P”는 “Rho”로 발음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모든 군기(軍旗)에 "Chi-Rho" 또는 "XP"를 붙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그는 AD 313년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정부에 의한 박해를 받지 않게 된 밀리노 칙령을 반포하며 기독교에 대한 핍박에 종지부를 찍었다.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의 표시는 “Chi” 또는 "X"로 줄어들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혹은 “Criss-Cross”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X-mas"의 기원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통치기간, 니콜라스가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불법이 아니게 됐으니, 그는 설교를 통해 이교도의 성적 음란에 대해 대놓고 비판했다.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울이 한 것과 똑같이, 그 역시 다산의 여신 아르테미스(다이애나)에 대한 우상숭배를 비난했다. 그녀의 신전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두배나 큰 규모의 에베소 아르테미스 신전(神殿)에는 127개의 거대한 기둥과 더불어 신녀(神女)라 불리는 창녀들이 있었다. 지중해 연안의 라스베가스였던 셈이다!

 

니콜라스의 "업화(業火: 불과 유황이라는 뜻으로 생생한 지옥의 모습을 묘사함) 설교"를 들은 뮈라 사람들은 자기네 동네에 세워놓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허물어 버렸으며, 불과 얼마 후 콘스탄티노폴 대주교(AD 397-403) 성 존 크리소스톰의 설교를 통해 그곳 시민들도 에베소에 있는 거대한 다이애나 신전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옷을 벌거벗고 기량을 겨루던 그리스 올림픽 경기들은 이 기간에 이교도의 작태로 간주되어 종말을 고했다.

 

니콜라스는 설교를 통해 점괘, 인신 제사, 영아적출(로마시대 낙태에 해당)을 강하게 꾸짖었다.

그후 교회 역사상 최초의 거대 이단이 시작됐다. 아리우스라는 이름의 성직자가 예수는 창조되었기에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라 떠들며 “아리우스파 이단”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이 이단종파는 교회뿐만 아니라 로마제국까지 분열시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주교들 전원에게 니케아로 모이라고 명령했다. 알려진 세상의 모든 주교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는 처음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를 작성하여 이 엄청난 이단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니콜라스도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는데, 이런 이단 교리를 시작한 아리우스에게 너무나 분개한 나머지 그의 따귀를 후려갈길 정도였다. 분명 호쾌한 우리들의 산타 할아버지께서도 성질이 좀 있으신 듯!

니콜라스는 이단 추종세력 뿐만 아니라 부패한 정치인들도 들이받았다.

 

 

자신의 부도덕한 행실들을 은폐하기 위해 한 로마총독이 무고한 군인 여러 명을 허위로 고발해서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얘기가 있었다. 니콜라스는 그 소식을 듣자 마자 급하게 달려가서 군중들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처형자의 칼을 빼앗아 움켜쥐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다음,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 총독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만천하에 폭로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통찰력이 아니라면 그토록 자세한 내용을 알 길이 없으리라는 걸 깨

달은 총독은 니콜라스가 무릎을 꿇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리스 정교회의 전통은 성 니콜라스의 기도에 수많은 기적적인 응답들이 베풀어졌다고 증언한다. 한번은 폭풍이 너무나 사나워 어부와 선원들이 바닷가로 돌아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니콜라스에게 도와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부두로 내려가 기도를 올렸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온 대로, 예수께서 바다를 잠잠케 하신 것과 유사하게, 어부와 선원들이 안전하게 항구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바다는 조용해졌다.  이는 후에 니콜라스를 선원들의 "수호성인"으로 만들었다.

 

기근이 온 땅에 퍼졌을 때, 니콜라스는 북아프리카에서 곡식을 싣고 로마로 가는 상선들에 부탁해서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곡식을 배에서 내려줄 것을 부탁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실 거라 약속하면서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배 안에 남아 있던 곡식이, 마치 열왕기상 17장 16절에서 엘리야가 과부에게 약속한 곡식가루 통처럼 몇 배로 불어났다고 알려왔다.

 

AD 34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스가 사망했다.

 

5세기 뮈라에는 그를 위한 교회가 세워졌다. AD 529년 지진으로 파손되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이를 재건했다. AD 988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1세 대제는 동방정교회로 개종하여 니콜라스를 러시아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11세기에는 이슬람 지하드 테러리스트들인 셀주크 투르크족이 소아시아로 쳐들어가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교회를 파괴했다. 그들은 또한 기독교 성도들의 무덤을 헐어버리고 훼손시켰다. 이슬람의 하디스 사히 무슬림 (제4권 2115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없애지 않은 단 하나의 형상도 남기지 말라, 또는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말고 모든 무덤은 쓸어버려라"

 

겁에 질린 기독교인들은 1087년 성 니콜라스의 유해를 이탈리아 남부해안에 있는 바리 마을로 옮겼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 니콜라스의 이름을 따서 바실리카 디 산 니콜라 데 바리라는 교회를 헌당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 사람 성 니콜라스가 서유럽에 정식으로 소개됐다.

 

11세기, 무슬림인 터키인들은 침략의 강도를 높였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 기독교인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 찾아가서 유럽의 군주들에게 군사원조를 요청할 정도였다.

 

유럽은 원조를 보냈다. 바로 제1차 십자군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동유럽을 침략했던 이슬람 성전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서유럽에 성 니콜라스의 전통은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 니콜라스는 어떻게 산타클로스가 되었나?

 

지금은 이탈리아에 있는 니콜라스의 유해와 더불어, 서유럽인들은 그와 관련된 “선물 주는 전통”을 순식간에 받아들였다. 1223년이 되자, 크리스마스 시즌에 선물 주는 것에 너무나 많은 관심들이 쏟아지는 통에 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그들의 관심을 되돌려 그리스도의 겸허한 탄생을 재조명하기 원했다.

 

프란치스코는 최초의 “고아원” 혹은 “성탄 장면” 속에 요셉, 마리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아기 예수께로 향하는 관심과 더불어 초라한 말구유 따위를 등장시켰다. "그리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요 1:14) …

 

비록 수세기를 지나며 이 성탄 스토리에 많은 것들이 더해졌지만, 그 모든 것들 아래, 4세기 소아시아에 살았던, 니콜라스라는 이름의, 경건하고 용감무쌍한 주교 한 사람이 있었다.

 

니콜라스는 예수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선교에 나섰으며; 신앙을 부정하느니 차라리 로마인들에 의해 투옥되는 편을 택했다.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했으며, 성적으로 타락한 이교도 신전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다. 부패한 정치가와 맞서고, 다른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 곤궁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해 이름없이 가진 돈 전부를 나눠줄 만큼 너무도 관대했다!

 

빌 페더러의 긴 칼럼의 내용은 여기까지다.

 

요즈음의 기독교를 돌아보며, 다시금 산타클로스가 던지고 가는 선물의 진정한 의미를 새겨본다. 아이들의 장난감 정도가 아닌 인간의 영혼 구원이라는 선물,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이 주 희 <국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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