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하지 않는 인간, 노예로의 전락

- 히틀러의 웅변, 소련의 군사 퍼레이드, 북한의 아리랑
- 베헤모스(Behemoth)의 한몸을 연상케 했던 촛불광장
- 자유대한민국이라는 내일의 태양을 떠올려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유명한 르네 데카르트 (Rene Descarttes : 1596-1650)의 회의론 (Skepticism)과 “이성은 감성의 노예”라는 명제로 유명한 스코트랜드 경험주의철학자 데이비드 흄 (David Humme : 1711-1776)의 회의론은 다르다. 데카르트는 끊임없는 회의 또는 성찰을 통해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해야 한다고 한 반면, 흄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체계적인 검증을 통해 그 어떤 철학적 독단도 막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강렬한 느낌을 주는 현실에 대한 인상이 인간의 뇌를 지배하는 관념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나아가 이런 관념에 대한 믿음이 수정불가한 지식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인간이 믿는 대부분의 지식은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늘 감성적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흄의 철학적 회의론 (Philosophical Skepticism)에 대한 현실적인 비유로 흔히들 마거릿 미첼의 장편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예화로 잘 사용한다. 그 이유는 소설보다도 1939년에 제작된 할리우드 명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유명세를 탄 까닭이다. 이 소설의 제목은 무엇인가가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얘기하는데, 무엇이 사라졌는지는 독자들의 관념마다 각각 다르다.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청춘이 사라진 건지, 남북전쟁에 패한 남부 연합국이 사라진 건지, 아니면 남부의 풍요를 제공해 주었던 노예제도가 사라진 건지... 개인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는 유럽전역에서 미국의 남부로 이민와, 노예제도를 발판으로 소위 신사와 숙녀 (Lady and Gentleman)의 소귀족적 지주문화를 이루었던 한시대의 문명이 소멸한 것을 얘기하고자 했다.

 

대농장을 가진 지주들의 저택들을 돌아가며 이런 저런 문화적인 고상한 파티들을 열고 나름의 귀족문화를 즐겼다. 남부연합의 반발로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넘쳐나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너도 나도 앞다투어 자원 입대했다. 그러나 그런 흥겹던 상황은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했다. 후퇴하는 남군과 불타는 애틀란타, 페허가 된 농장들, 전사한 수많은 지주가문 자제들의 비보, 생존을 위한 산자의 처절한 몸부림이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감정을 자극하는 강렬한 인상들은 독자들의 관념이 되고, 결국 변치않는 지식으로 자리매김하여 찬란했던 미국 남부문명의 소멸을 안타깝게 애도하게 된다.

 

흄의 회의론 설명을 위한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독백이다. 흄에 의하면 내일은 경험하지 않은 미래다. 따라서 만약 자신이 처한 비관적 현실을 넘어 뭔가 긍정적인 희망의 미래를 생각했다면, 이는 정신나간 생각이라고 단정했을 것이다. 경험하지 않은, 즉 인상이 없는 관념은 단지 허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치 황금으로 덥힌 엘도라도 산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사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란 번역은 일본어 원역과는 조금 다르다. 바람과 태양이라는 단어를 통해 스칼렛 오하라의 척박한 현실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지만, 전형적인 한국인의 희망적 감성팔이로 접근했고 그 결과 이 영화를 본 모든 한국인들은 미국인, 유럽인, 일본인들보다 더 굳세게 허구적인 희망고문을 품는 신데렐라 신드롬을 경험하게 되었다.

 

 

흄의 철학적 회의론의 핵심인 감성에 휘둘리는 관념문제가 왜 중요한가 하면, 흄의 철학이 전체주의자들의 선전, 선동에도 십분 이용되어졌기 때문이다.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을 현혹할 때 무조건 감성팔이 선동을 해댄다. 대형 스타디움에 밀집한 10만 군중의 열기, 펄럭이는 나치 휘장, 질서정연한 퍼레이드 속 히틀러의 신들린 듯한 웅변은 상상을 초월하는 관념으로 군중들에게 다가가고, 절대 변치 않는 진리로서의 지식으로 뇌리를 파고 든다. 소련군과 중공군의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와 수만의 군중이 참여하는 북한의 아리랑 공연이 동일한 효과를 낸다.

 

민주주의 국가의 대자보는 질서 없이 지저분하고 너덜너덜하다. 하지만 전체주의국가의 대자보는 언제나 섬뜩할 정도로 정연하고 일목요연하다. 마치 조지 오웰 (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 나오는 진리부 건물에 엄청난 크기로 휘날리는 휘장 “자유는 노예의 길”처럼 말이다.

 

7년 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는 한편의 북한 아리랑 공연을 보는 듯 했다. 수십만의 군중이 촛불을 들고 마치 운동경기장의 응원석처럼 대규모 물결파동까지 연출을 할 수 있었는지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었다. 구미권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수백명 정도의 시위현장에서도 난리가 나는 것이 일반적인데, 2016년 초겨울 광화문 광장은 성서에 나오는 육지괴물 베헤모스(Behemoth)처럼 한 몸으로 움직였다.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지키고 종북 좌익들의 국가전복시도를 막아보겠다고 당시에 나섰던 광화문의 자유애국시민들과는 대조적으로, 수십만 군중을 마치 전체주의국가의 군사 퍼레이드처럼 일사분란하게 조율하고, 조정했던, 지하세계의 힘이 분명히 존재했었다. 바로 그 힘이 문정권 5년 내내 대한민국을 파괴했고, 천신만고 끝에 이겨낸 대선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윤석열 정부를 흔들고 있다.

 

체제수호의 첨병역할을 담당해야하는 권력기구들이 심각한 내홍을 겪고 있고, 선전선동의 관념에 노예가 된 세력들이 대한민국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는 이때, 흄은 최후의 마지막 순간까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해, 보여지고 느껴지는 모든 사물들을 회의라는 검증을 통해 진실을 가릴 수 있어야 한다며 오늘의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강 · 량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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