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참사’와 때리는 ‘시누이’

- 슬픈 표정에 눈물까지 흘리며 정치적 계산
- 산자의 오만함과 잔인함을 느낄 수밖에
- 분노의 언사로 정치적 입지 확대도 노려
- 슬픔의 가면을 쓴 위선자에게 철퇴를...

 

  “2003년 4월 20일 첫 방영한 SBS의 개그 프로그램이며... 주로 풀네임보다는 약어인 ‘웃·찾·사’로 더 유명하다...”

 

  이 슬픈 계절에 웬 ‘웃음’ 타령이냐고? 분명 철딱서니 없고, 앞뒤 분간이 안 되는 짓거리가 맞다. 그래도 한마디 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웃음을 참는 사람들’(웃·참·사)에 관한 넋두리다.

 

  사람의 목숨보다 중한 게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생때같은 청춘이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면... 그저 명복(冥福)만을 빌 수밖에 없는 형편에 가슴이 저려온다. 백 마디 말인들 그 심정을 대변하겠나. 많은 국민들은 어찌 됐든 크게 다르지 않을 거 같다. 이런 가운데...

 

  벌써 (아마 주둥이라는 표현이 딱 일 듯하다만)이 근질근질해서 견디질 못하는 작자들이 널려있다고 한다.

  겉으로는 슬픔에 잔뜩 젖은 듯 X 씹은 표정을 하거나, 심지어 눈물을 훔치기까지 한다. 커다란 사고가 발생하면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언어를 지껄이며...

 

  “예고된 인재(人災)”

 

  저들에게서 신(神)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오만함을 발견한다. 인간이 어찌 재앙을 예고한단 말인가.

  어디서(흔히 화장실이라고들 한다)든 저들은 서로 킥킥대며(하이 파이브도?), 어찌하면 이 국면을 최대한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을까를 궁리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재빠르게 계산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국민들은 저들의 속심을 꿰뚫고 있다질 않던가. 아마 그런 점도 계산에 넣고 있어서인지 돌다리 두들기듯 입과 행동거지를 조심(?)하는 척했다. 하지만 본질·본색이 바뀌기야 하겠냐는 수군거림이 저잣거리에서 그치질 않고 있다.

 

남영희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30일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대통령실 용산 이전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밝혔다. 남 부원장은 해당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게시글을 삭제했다...

 

  주책없이 섣부르게 속심을 내보인 여인네가 그 무리에게서조차 손가락질을 받았다지 뭔가. 그래도 크게 질책은 하질 않는다고. 이심전심(以心傳心), 염화미소(拈華微笑)이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드디어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았다. ‘웃음을 참는 사람들’(웃·참·사)은 그 유명한(?) 털보를 위시하여 슬슬 입질을 본격화했단다. 그날 경찰의 얼빠진 대처에 내심 환호하고 있을 터이다. 앞으로 미간(眉間)에 더 깊은 주름살을 만들고는 씹고 뜯고 맛보려 할 건 너무도 뻔한 수순이다.

  더군다나 실천으로 보여주겠다며 설쳐대는 무리도 있다는데...

 

촛불행동은 지난 31일 촛불집회 유튜브 채널 ‘촛불전진’에 올린 공지를 통해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11월 5일로 예정됐던 촛불행동 13차 집회를 ‘이태원 참사 추모 촛불 집회’로 진행한다”며 “연대와 추모의 마음을 모아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 “장소는 광화문 광장을 사용하기 위해 서울시에 요청했고, 답변을 기다리는 상태”라며...

 

  “예정된 수순!”.... 더도 덜도 아닐 듯하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게 있다. 웃음을 참든 말든, 대로(大路)에 모여서 낄낄거리든 흑흑 대든 그건 즈그들 마음이다.

  하지만, 저들에게서 “니들이야 죽든 말든, 우리는 이렇게 쌩쌩하게 살아서 하고 싶은 걸 한다!”고 외치는 섬뜩한 잔인함을 느끼게 된다. 타인(他人)의 귀중한 목숨을 자신들의 더러운 자산(資産)으로 만드는 신기(神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런 가운데...

 

  ‘웃음을 참는’ 대신 분노를 폭발시킨 양반네가 있었으니....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이 31일 이태원 압사 참사와 관련한 주무 장관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해 파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장관이 면피성 발언으로 야당은 물론 여당으로부터도 비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파면 필요성을 제기한 건 유 전 의원이 야권보다 먼저다.

 

  잘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이 나라의 안전을 책임지는 부서의 장(長)은 최우선으로 머리 숙여 사죄하는 게 마땅한 도리다. 그러하지 못한 건 엄중한 실책이다. 그러나...

 

 

  저 양반네는 매를 들고 때리는 시에미를 말려야 하는 시누이뻘쯤 되지 않는가. 그리 자처해 오기도 했다. “그래도 보수”라는 시중의 평가도 있고. 그런데...

 

  비록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는 해도, 말리기보다 먼저 눈을 부릅뜬 채 몽둥이찜질을 하겠다고 나섰다. 왜?

  저잣거리에서는 그 양반네의 속심과 노리는 바가 ‘웃음을 참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들 한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본다.

 

  바로 그 시절,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가 중단·파괴되는 탄핵사태의 와중에 시장바닥에서는 그에게 ‘달배오’란 별명을 붙여줬다. ‘달구벌 배신자 오야붕’...

  그 양반은 그 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개혁적(改革的) · 보수(保守)를 · 지향(指向)한다’며 큰 꿈을 펼쳐 보였다. 물론 꿈이 실현될리는 없었다. 당시에도 그랬고, 그걸 계속 견지한다는 오늘날에도 그 의미와 실체가 뚜렷하지는 않다는 지적만 무성한 채...

  아마 짐작컨대 이 나라 청춘의 죽음 앞에서 ‘때리는 시누이’가 되어 시선과 인기나 끌어보겠다는 유(類)의 노선은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요즘 한껏 명성을 드높이는 ‘개딸’과 한편이 아닌지 진즉부터 의심해 온 국민들도 꽤 많긴 하다.  같은 ‘개’자 돌림이기도 하고. 이와 함께...

 

  그보다는 ‘웃음을 · 찾는 · 사람들’이 ‘웃 · 찾 · 사’로 널리 알려진 것처럼 혁적 · 수를 · 향하는 분’도 그런 방식으로 부르게 되면, 그 양반네의 정체성이 훨씬 선명하게 나타날 거라고들 한다. 아무튼...

 

  생때같은 우리 청춘들이 안타깝게 곁을 떠났다. 슬픔의 가면(假面)을 쓴, 셈법이 각각 다른 부류(部類)·족속(族屬)·무리들이 그 넋마저 고이 보내지 않으려 한다.

  여러 목소리가 쏟아지지만 공통적이며 확실한 게 있다. 그 속셈에 편승·동조·동참한다면... 가증스런 위선(僞善)에 철퇴를 가하지 않는다면... 희생은 단순한 죽음이 되고, 거듭 그런 희생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그 동네 이름과 같은 가수가 불렀던 노래의 몇 소절을 쓸쓸하게 읊조려 본다.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나르는 솔개처럼

 

소리 없이 날아가는 하늘 속에

마음은 가득 차고

푸른 하늘 높이 구름 속에 살아와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

지쳐버린 나의 부리여...

 

李 · 斧 <主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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