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열린 사람 되자

- “천지 기운이 내 기운, 천지 마음이 내 마음”
- 노자(老子), 자연의 질서에 순응할 것 강조
- 조화 속에서만이 진정한 생명의 가치 실현

 

 

서양철학에서는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를 기본적으로 부정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권의 분야만 논하려 한다. 물증을 데이터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역사학에서는 철저한 문헌 고증학적 입장에서 머물러 있어, 과거 사실을 고증하는 수준,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실증주의는 인간이 ‘천지의 변화법칙’에 따라 정신문화를 주도적으로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선조들은 깨달음을 통해 우주와 내가 하나[宇我一體]라는 자연의 이치를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망념(妄念)으로 채워진 작은 의식을 버리고,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천성(天性)을 되찾으라고 강조(強調)했다. ‘천지 기운이 내 기운이고 천지 마음이 내 마음’이라는 깨달음을 이룬 상태, 즉 모든 관념에서 벗어나 우주와 일체감을 느끼는 무(無)의 경지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선조들은 우주 자연과 인간 만사(萬事)의 상호 관련성을 바탕으로 한 인과법칙(因果法則)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과 지구와 하늘은 자연의 원리와 법칙에 따라 운영되므로 결코 그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고 밝혔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하늘이 상도(常道)를 벗어나면 큰바람이나 폭우가 내리게 되고, 사람이 상도(常道)를 벗어나게 되면 병들거나 죽게 된다’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 사상가 노자(老子)는 자연의 질서에 순응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사람은 땅의 질서를 바탕으로 살아가고[人法地], 땅은 하늘의 질서에 부응하여 운영되며[地法天],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天法道], 도(道)는 자연을 본받는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사람과 땅의 작용은 유심히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만, 하늘[天] · 도(道) · 자연(自然) 같은 형이상(形而上)의 문제는 쉽게 알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는 기본원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다. 균형이란 저울대의 기능과 같다. 저울대의 수평이 무너지면 한쪽으로 쏠린다. 이처럼 균형은 상대적이다. 그렇다고 균형을 이루었다고 해서 끝나지 않았다. 정적(靜的)인 상태에서 동적(動的)인 상태로 이동해야 한다. 균형의 상대를 향한 움직임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를 지향해 움직일 때 조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자전하면서 태양의 궤도를 따라 공전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고 있다. 우리가 자연재해라고 부르는 태풍(颱風)이나 해일(海溢)도 자연의 입장으로 보면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다. 구심점(求心點)이 변할 때 판각(板刻)이 뒤틀리면서 지진(地震)이 일어나고 용암(鎔岩)이 분출하는 것이다. 지구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도 지구가 받는 영향을 똑같이 받는다.

 

우리 인간의 실체(實體)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인간은 육체(肉體)와 기체(氣體)와 영체(靈體)의 조화 체계로 구성되어있다. 육체는 크게 보이는 질서와 보이지 않는 질서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이는 질서는 골격 · 근육 · 피부를 근본 구조로 하고, 혈관과 신경망을 통해 연결되어 혈액과 산소를 유통하는 체계로 이루어져 있고, 보이지 않는 질서는 경혈과 경락을 통한 기적(氣的) 시스템으로 이뤄졌다.

이런 육체는 내 것일 뿐, 나의 실체는 아니다. 육체는 삶의 가치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영체의 도구일 뿐이다. 육체의 가치는 영혼의 완성을 위한 쓰임에 있고, 정신이 몸을 다스림으로써 의식의 진화가 이루어진다. 육체는 정신 작용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육체가 건전하다는 것은 정신이 건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체를 참 자아로 알면, 육체 만족에 급급한 삶을 살게 되어 영적 완성과는 멀어지게 된다.

 

정신을 건전하게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그런데 마음은 실체가 없어 육체가 없으면 한 치(値)도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마음은 생각이라는 처리 과정을 통해 육체를 작용한다. 마음이 지배하는 생각은 뇌(惱)를 통해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분노와 적대감이 생기면 심장박동을 빠르게 하고, 불안감에 사로잡히면 식은땀이 흐르고 속이 답답하면서 온몸에 힘이 빠진다.

 

 

‘마음이 열린 사람 · 깨우친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다. 마음 자체에 생사 · 선악 · 시비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선택할 수 있는 실체는 조화(造化)이다. 조화는 본성의 율려(律呂) 속에서 이루어지며, 이런 조화 속에서만이 진정한 생명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생각을 쓰면 소인(小人)이라고 하며, 마음을 쓰는 사람을 대인(大人)이라고 하는 것이다.

 

松 岩  趙 · 漢 · 奭 <명상 및 치유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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