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민요에 “나는 살고 있다. 그러나 나의 목숨의 길이는 모른다”는 것이 있다. 그런데,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모르고, 또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알려고 애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많다.
하지만, 모두들 자기 나이에 대해서는 조금은 민감하다.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또 몇 해 동안 어떤 일을하며 살아왔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몇 해 동안 어떤 보람있는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가 중요하다. 바꾸어 말하면, 얼마만큼 나잇값을 하며 겸손하게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며 살아왔고,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이승이 아닌 다른 세상을 향해가면서 바른 노자로 준비를 하는지가 중요하다.
문제는 나잇값이다. “나잇값을 해라, 나이 헛먹었나”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는 나잇값이 비운 밥그릇 숫자에 따라 그냥 거저 얻어진 헐값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는 그 나름대로 상당한 값이 나간다. 고래로부터 언제 어디서나 변치 않는 진리다. 나이가 많은 분에게 함부로 대하다간 큰코 다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나이가 많은 것은 적은 것보다는 그냥 값이 더 나갈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격은 갖추지 못한 채 나이에만 따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나잇값을 스스로 똥값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나잇값을 하는 인격의 사람은 듣지 않아야 할 것은 밝은 귀이지만 듣지 않으려 하고, 또 보지 않아야 할 것은 밝은 눈이지만 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나잇값을 못하는 인격의 사람은 듣지 않아야 할 것도 어두운 귀로 들으려 하고, 또 보지 않아야 할 것도 어두운 눈으로 보려고 한다.
이와 같이 나잇값은 단지 비운 밥그릇 수에 따르기보다 많은 부분이 인격에 따른다.
특히, 겸손하게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며 살아온 국가 및 사회 원로의 나잇값은 억지로 그 값을 깎는다고 쉽게 깎여지지도 않을뿐더러, 그 값 또한 함부로 매겨지거나 헐값에 넘겨지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원로의 나잇값은 그리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나잇값을 하는 원로들은 윤리 및 도덕이 무너지고 사회가 혼탁하게 되면, 잘 들을 수 없는 귀이지만 옳은 것을 들으려 하고, 잘 볼 수 없는 눈이지만 옳은 것을 보려 하고, 잘 말할 수 없는 입이지만 옳은 말을 하려고 한다. 더 나아가 잘 행할 수 없는 몸이지만 옳은 것을 행하려고 한다.
하지만 거만하게 말과 행동을 거칠게 하며 살아온 위선자는 윤리 및 도덕이 무너지고 사회가 혼탁하게 되면 여기 언급한 원로와는 정반대로 한다.
국가 및 사회에서 원로의 나잇값은 그 어떤 것보다도 고귀한 값을 갖는다. 반면에 위선자의 나잇값은 한순간은 금값이었으나, 기자불립(企者不立)이듯이 곧바로 똥값으로 되어 버린다. 따라서 일반적 상념의 공정과 상식으로 삶을 하늘로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들도 겸손하게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며 티끌만한 위선도 버리며 살아간다면, 원로의 나잇값과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고귀한 값을 가질 것이다. 세상의 이치 아닌가.
우리들도 비운 밥그릇 수에 따른 값이 아닌 인격에 따른 값을 받으며,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의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날 때에 노자에 보태어 쓸 수가 있는 나잇값을 가지도록 하자.
深 · 思 · 翁 (심사옹) <객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