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다소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독선의 창을 통해서 무엇을 보고 느낀다. 이것은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남이 이야기 한다고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특히, 남들을 받들기보다 남들로부터 받들려져 온 삶에서, 남의 간섭을 그다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독선의 창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공양이나 봉헌 등에 단 한 번도 빠지거나 지각하는 일이 없이 정진하는, 속세를 멀리한 일부 수도자, 즉 신망을 받고 있는 신부님·수녀님·스님·목사님 등에게 많이 나타난다. 또한, 자신의 글과 말만 보았을 때에 인격에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어 보이는 일부 문필가나 학자 등에게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사회적 선망의 지위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고 있는 일부 국회의원·장차관·판검사 등에게 많이 나타난다. 이들은 대체로 현실 세계의 일반인이 가지는 보편타당성이 결여된 독특한 독선의 창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대로만 말하고,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자신이 행동하고 싶은 대로만 행동하는 것을 원한다. 이는 남을 의식하는 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비롯되며, 독선의 창 때문이다. 누구나 예외가 없이 독선의 창을 다소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서 얼핏 보이는 것은 용납하지만 지나친 독선의 창은 허락하지 않는다.
어느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로 망언을 강직으로 변명하는 것과 같이, 보편타당성이 결여된 위선자의 독선의 창은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의 어떠한 점이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누구에게 그렇게 보였다면, 그러하다 해야 할 것이다. 또 그렇지 않게 보였다면, 그러하지 않다고도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누구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자신이 깨닫지 못한 어떤 확증편향의 그릇된 신념 등이 자신에게 내재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편타당성을 결여되지 않도록 하면서, 확증편향의 그릇된 신념 등을 없애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중용(中庸)의 도(道)를 취하려고 한다.
무릇 사람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다른 창으로 어떻게 비춰질까를 생각하여 독선의 창을 없앨 수 있다. 사람들이 본질에 변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확증편향의 그릇된 신념 등이 지나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창으로 비춰지는 것만 보지 말고, 다른 창으로 어떻게 비춰질까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봐야 한다. 특히,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이 큰 판단과 결정을 하는 사회지도층은 보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늘 염두에 둠으로써 독선의 창을 없애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중용의 도를 취할 수 있어 세상을 보다 조화롭게 할 것이다.
深 · 思 · 翁 (심사옹) <객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