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 관창·밴플리트·마오안잉(毛岸英)의 부(父)와 조(曺)·추(秋),·문(文)
- 너무나 다른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아시타비(我是他非)

 

지도자로서의 임무를 다한 관창의 아버지 김품일 장군, 제임스의 아버지 밴플리트 장군, 마오안잉의 아버지 마오쩌둥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망국의 가족이 겪을 고통을 생각해서 처자를 죽이고 결연히 황산벌 전투에 임한 백제의 충신 계백 장군에 연패를 당하던 신라의 충신 김품일 장군은 아들 관창을 두 번이나 사지로 보냈다. 그리고 주검으로 돌아온 마상(馬上)의 아들을 보고 인간으로서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있었지만, 전장에 임한 장군으로서 다른 병사와 화랑(花郞)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삼국통일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또, 북한이 일으킨 6·25전쟁에 참전한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아들 제임스 중위를 6·25전쟁에 참전을 시키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위치에 있었지만 참전시켰다. 그는 압록강 남방 50km 지점에 있는 순천을 정찰 폭격하여 중공군의 주보급로를 분쇄하는 교살작전(絞殺作戰)에 참전한 아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작전이 내 아들을 찾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며 수색을 중단시켰다. 다른 실종자의 부모들에게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일 줄로 압니다”라는 위로의 말을 남겼다.

 

또 더 나아가, 마오쩌둥(毛澤東)은 두번째 부인이자 혁명동지인 양카이후이(楊開慧) 사이에서 낳은 신혼 1년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참전에 대해 주위의 많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오쩌둥의 아들이다. 죽음이 무서워 참전을 피한다면 어느 누가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겠는가”라면서 장남의 참전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펑더화이(彭德懷) 사령관 숙소에 퍼부어진 미군의 폭탄세례에 의한 장남의 전사를 받아들여야 했다. 펑더화이는 저우안라이(周恩來) 총리의 허락을 얻어 전황을 보고 하러 베이징 와서 마오쩌둥에게 “마오안잉을 보호하지 못한 것은 제 탓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며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보고를 받고서 “혁명전쟁은 언제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오. 장남도 희생된 수많은 혁명열사 중의 한 사람이며, 보통 전사자들 중 단 한 사람일 뿐입니다. 나의 아들이기 때문에 큰일을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지만, 담배를 피우면서 큰 한숨을 쉬며 “그 놈은 마오쩌둥의 아들이니까….” 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후에 장남의 시신 송환 문제가 논의되자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이니 그냥 조선반도에 두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세상에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 중에도 자기 자식이 혁명을 위해 피를 뿌리고 희생된 이가 아주 많습니다”라고 발표하였다.

 

근간에 우리사회의 건전한 상식을 깡그리 무시하였으며, 정의와 도덕을 무너뜨린 일이 있었다.

한비자에 “안위재시비(安危在是非) 부재어강약(不在於强弱)「국가의 안위는 시비에 달린 것이지 국력의 강약에 달린 것이 아니다”는 말이 있음에도, 정권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권의 많은 이들은 늘 아시타비(我是他非)하며 자신들의 두레박줄은 굵고 화려하다고 자찬하였지만, 정작 두레박줄이 짧은 것은 탓하지 않고 남의 집 우물이 깊은 것만 탓하였다.

 

김품일 장군, 밴플리트 장군 및 마오쩌둥과는 달리, 지도자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채 비수에 발린 꿀을 핥아 죽음을 자초한 자들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조 전 법무장관은 이중 국적의 아들의 입영은 수차례 연기하도록 허용하였으며, 스스로 언제 입영시키겠다고 하고서는 그 말조차 지키지 않았다. 물론, 부인과 관련된 일로 자택 압수수색 중인 검찰 특수부 팀장에게 전화를 한 것을 두고 "아내의 건강을 배려한 부탁... 인륜의 문제"라고까지 한 적이 있다.

 

또, 추 전장관의 장남 서아무개가 주한 미8군 한국군 지원단 카투사로 복무 중, 약 20일 남짓 군에 복귀하지 않고 연속으로 휴가를 썼다. 당시 추 전장관 보좌관의 전화를 받은 장교가 사전에 전화로 휴가 연장 절차를 밟았기 때문에 군무이탈은 아니라고 하였으나, 여러 정황상 부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은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추 전장관은 장남의 논산 훈련소 수료식 때에, 자신은 파주에 있으면서 의원 간담회 명목으로 주유비와 소고기 식당의 식사대를 정치자금법을 위반하며 부정하게 지불한 것으로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았다.

 

 

또 더 나아가, 근간에 문 대통령의 아들이 “긴급 예술 지원금”을 지원받은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자, “작가에게 수익으로 주는 돈이 아니라 작가가 전시·작품 제작에 사용하는 돈”이라고 해명을 하였는데도 문 대통령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전에는 딸 다혜가 국가재정이 많이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외국에 나가는데도 일절 언급한 적이 없었다. 또 출가한 딸 다혜가 청와대에 들어가 사는데도 어떠한 만류를 하지 않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다하기 위해 자국이 아닌 타국의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의 아들은 142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며 원수였던 미국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 아들 존 소령은 미3사단 대대장으로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다.

또한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의 아들 샘 대위는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의 아들 빌 대위는 일선 소총 중대장으로 자원하여 참전해서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서 부상을 입고 소령으로 진급하였으나 부상의 후유증으로 후일 사망하였다.

미 해병 제1항공 사단장인 해리스 소장의 아들인 해리스 해병 소령도 장진호 철수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지도자가 자신의 아들을 전쟁에 참전시키는 등의 임무를 다하였기에 보통의 사람들도 자국이 아닌 타국의 6·25전쟁에 흔쾌히 자신의 아들을 참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지도자로서 임무를 다한 자와는 달리, 지도자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자에 대해 살펴보면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보통의 많은 국민은 지도자로서 임무를 다한 자와 함께 한다면 국가 구성원의 일원으로 자신의 아들을 전쟁에 참전시킬 것이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자들과 함께 한다면 자신의 아들을 전쟁에 참전시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전쟁에 참전시키더라도 승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가 되겠지만, 만일 승리하더라도 그 전공은 지도자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자들이 가져 갈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켜가면서 전쟁에 참전시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지도자는 이와 같은 시비(是非)를 분별하지 못하고, 자화자찬에 아시타비(我是他非)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얼마지 않아 들어설 새로운 정권에는 지도자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자가 없어야 한다.

 

몸은 바른데 그림자가 굽을 수 없고, 상류가 맑은데 하류가 어지러워질 수 없듯이 지도자로서의 임무를 다할 때에 국민도 정권과 함께 한다.

 

深 · 思 · 翁 (심사옹)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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