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은 격랑 속에 있다. 안팎 모두에서 그렇다. 그런 가운데 중대한 선택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대선에서의 선택이다.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도 중대한 선택이다. 오는 대선에서의 선택은 앞으로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기로가 될 것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래 이 나라는 그야말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난장판이 되었다. 이 난장판을 중단시키고 다시 회복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더 지독한 나락의 수렁으로 전락할 것인가가 이번 대선에서의 선택에 달려 있다.
전동혁 신부의 <대수천> 미사 강론
그런 점에서 지난 9일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월례미사에서 있었던 전동혁 신부의 강론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전동혁 신부는 그간 이 정권 무리들의 난행에 맞서 싸워온 싸움이 얼마나 고달프고 외로운 싸움이었던가를 말했다. 전동혁 신부는 그 싸움이 외로운 것은 그릇된 매도의 목소리가 위세를 부리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했다.
“이 나라를 사회주의와 공산혁명으로부터 지켜내고, 눈부신 경제성장을 통하여 빈곤이라는 죄악을 몰아내고, 상위 5%의 경제대국의 지위에 올라 미래의 문을 열었을 뿐 아니라 21세기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게 만든 주인공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주역들과 그들의 피땀은, 슬프게도 ‘그들의 통치와 업적은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일 뿐이었다’는 이 한 마디로써 끝나버렸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모든 생각, 주장, 정책 앞에 ‘독재적인, 정의롭지 못한, 반민주적인, 기득권적인, 비인간적인, 반인권적인, 친미적인, 토착왜구 같은, 반민족적인, 반역사적인, 반사회적인, 반노동자적인, 가진 자들을 위한, 자본주의적인, 반환경적인, 반인륜적인, 비도덕적인, 비복음적인, 수구적인, 시대착오적인, 보수골통적인’ 등등의 수식어를 입혀버립니다...”
이 같은 논리가 어느 때인가부터 이 나라 전역을 물들이고 횡행했다. 현 정권은 그 같은 논리를 앞세우며 자신들이 ‘정의’의 화신인양 행세를 해왔다. 정권 당사자들만이 아니다. 그 무리들, 그 지지 패거리들도 그렇게 정의의 행세를 하곤 했다.
‘정의구현’이라는 간판이 정의를 구현하지는 않는다
<정의구현사제단>의 경우는 어떨까? <정구사>는 ‘정의구현’을 간판으로 앞세우고 있다. 그러나 <정구사>가 말하는 정의란 게 과연 정의일 수 있을까?
<정구사>가 내세우는 주장들은 정치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사제단’이라는 명의를 가리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정치단체로 여길 것이다. 게다가 그 주장은 매우 편향적이다. 좌편향에다 심지어 친북적이기까지 하다.
2013년에는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인 박창신 신부가 2010년에 있었던 연평도 포격에 대해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구사>가 내세우는 정의는 대한민국을 위한 정의일 수는 없다.
뿐만 아니다. <정구사>는 현 정권과 그 대선후보의 형언할 수조차 없는 범죄적 부도덕에 대해선 단 한마디의 말도 없다. 선택적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단지 정의를 빙자한 정략적 행태에 불과하다. 그것은 타락이며 죄다.
‘정의를 자처하는 것’과 ‘진짜로 정의로운 것’은 아무 관계가 없다. ‘정의구현’이라 하면 더욱이 그렇다. 명(名)과 실(實)의 상부(相符)는 쉽지 않다. 내세우는 말과 실상의 행태는 반대이기 일쑤다. 경솔해서든 오만해서든 그렇다.
그런데 ‘경솔함’과 ‘오만함’은 늘 ‘더불어’ 간다. <정구사>의 ‘정의구현’은 내용도 경솔과 그릇됨의 점철일 뿐더러 자세는 오만하다. 오만으로 겸손을 잃으면 악의 수렁으로 끌려간다. 원튼 원치 않든 그렇게 된다.
선택! 대한민국이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해야
<정구사>의 그간의 행태는 상식과 양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탄식을 자아냈다. 한국천주교의 입장에 대한 오해마저 불러일으키곤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구사>가 한국천주교의 대표적인 사제단체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구사>는 한국천주교회의 공식 조직이 아니다. 당연히 <정구사>의 주장들은 한국 천주교의 공식입장이 전혀 아니다. 더욱이 한국천주교에 <정구사>와 같은 부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달픔과 외로움을 견디며 계속 싸워온 <대수천>과 같은 모임도 있으며 '전동혁' 신부 같은 이도 있다.
전동혁 신부는 “우리가 외치지 않으면 돌멩이가 외치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라고 했다. 누가복음 19장 40절의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라는 말씀대로였다.
전동혁 신부는 그리고 이 싸움은 “외롭지만 외롭지 않다”고 격려했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자들이기에 외롭지 않다”고 했다.
의(義)로움은 떠드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일 터이다. 다가오는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 어떻게 하는 것이 의로움을 지키는 것일까? 사람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인연과 관계에 따라 입장에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막아내는 데 같은 마음이라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 불의한 시대가 더 이상 계속되지 않게 끝내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 · 강 · 호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