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동생 김영주, 101세로 사망… 조카 김정일에 밀렸지만 10년 더 살아

- 권력 핵심인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역임
- 김일성 시대 대표적 2인자 노릇
- 1973년 조카 김정일 등장 후, 실권 잃고 ‘유배 생활’도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101세로 사망했다.

조선중앙통신은 15일 "김정은 동지께서는 김일성훈장·김정일훈장 수훈자이며, 공화국영웅인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김영주 동지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 화환을 보내시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김영주 동지는 당과 국가의 중요 직책에서 오랫동안 사업하면서 당의 노선과 방침을 관철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으며, 사회주의 건설을 힘있게 다그치고 우리 식의 국가사회제도를 공고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였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화환을 보냈다고 한다.

 

1920년생인 김영주는 권력 핵심인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지낸 김일성 시대 대표적 2인자다. 중앙당에서 활동하기 전에는 모스크바에서 유학 생활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때문에 소련 유학파들이 김영주와 함께 권력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60~70년대까지 당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국 비서로 승승장구하며 형인 김일성을 보좌했다. 자연스럽게 그가 북한의 2인자로 여겨졌고, 김일성 유고시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지배적인 때였다.

 

그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에도 관여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북한의 2인자로 여겨지는 김영주와 접촉해 남북 대화를 추진하는 데 공을 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7·4공동성명에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서명했다.

 

김영주의 정치적 위상은 조카인 김정일의 등장과 함께 달라진다.

1973년 김정일에게 당 조직지도부장 자리를 넘겨준 김영주는 1974년에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기도 했지만 이후 하루아침에 권력 핵심부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는 자강도로 거처를 옮겨 평양과 거리를 둔 것으로 파악됐다. 이를 두고 후계자의 본격적인 등장과 함께 그가 '숙청' 당했다는 설이 제기됐다.

이에 반해, 그가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스스로 주변을 정리하고 평양을 떠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북한의 첫 후계 구도 수립 과정에서 내부 투쟁 등 정치적 파장을 잠재우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자강도에서의 생활도 정치적으로는 '유배'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생활에 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 1993년 12월 김영주는 정치국 위원과 국가 부주석으로 임명되며 중앙당으로 복귀한다. 한때 막강한 2인자였다 사라진 그가 약 20년 만에 갑자기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학계에서는 김영주의 재등장에 대해서 해석이 나뉘었다.

 

1993년은 이미 김일성이 권력을 아들인 김정일 위원장에게 물려주고 실질적인 국정 운영 권한을 상당 부분 넘긴 상황이었다. 때문에 김영주의 인선은 '권력으로의 복귀'라기보다는 이른바 '백두혈통' 원로에 대한 대우와 '백두혈통'의 정당성 강화를 위한 사상전의 일환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반면 정치적 위상 자체는 낮아도 그의 복귀는 김정일에 대한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이 부여된 의미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복귀' 이후 김영주는 두드러진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라는 명예직을 맡아 핵심 국정 결정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2010년에는 당 정치국 위원 자리도 내놓았다.

2015년 7월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 때 투표하는 모습이 공개된 뒤로 사망 때까지 공식석상에서 포착된 바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 전 마지막 공개활동은 2015년 7월 19일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 때 투표였다. 조선중앙TV는 그가 투표를 마친 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사진을 향해 절하는 모습을 방영했다. 김영주는 조카인 김정일에게 밀려 ‘권력의 1인자’ 자리는 차지하지 못했으나, 한참 나이어린 조카 김정일보다 10년을 더 살다 갔다.

인생은 그래서 앞을 내다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일까?

 

김 · 성 · 일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