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前) 대통령 ‘별세’ …“북녘 땅 보이는 전방에 뼛가루 뿌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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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이자 친구인 노태우 전 대통령 이어 한달만에 또 비보..
-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동시에 이룬 대통령

 

전두환 전(前) 대통령이 23일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이날 별세한 전 전 대통령의 유언은 자신의 회고록에 담긴 '북녘땅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그냥 백골로 남아 있고 싶다'였다.

 

앞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전우이자 친구인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지난 10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격돼 사망한 1979년 10.26과 같은 날이다.

 

육군사관학교 11기인 두 명의 전 대통령들은 박 전 대통령 사망 후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두 명의 전 대통령은 군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오랜 기간 함께 했다. 노 전 대통령은 12·12의 주역 중 한 명이었고 전두환 정부(제5공화국)에서 내무부장관,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대표를 지냈다. 1987년 대선에서 승리, 전 전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이들 전 대통령들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동시에 이뤄냈다는 경제적 성과를 거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1980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6%,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7%에 달했다. 경상수지는 오랜기간 적자였고, 실업률은 5.2%에 달했다. 여기에 국제 유가가 급등한 ‘오일 쇼크’까지 발생해 국가 자체가 흔들거리는 상황이었다. 국가 신용도가 낮다 보니 은행에서 신용장 개설이 어렵고 해외에서 차관을 빌리는 것도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전두환 정부의 경제정책은 고질적 물가 불안의 해소, 중화학공업의 전면적 구조조정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성장과 물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성장을 추구하자면 물가상승 위험이 있고, 물가를 잡으려면 성장이 더뎌질 수 있다. 때문에 전두환 정부는 성장 대신에 물가부터 잡는 안정화를 택했다. 가파른 물가 상승은 서민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공권력으로 공산품 가격 인상을 억제했다. 근로자 임금과 추곡 수매가는 묶고, 수입규제는 풀었다. 여기에 예산까지 동결ㆍ긴축해 시중에 돈이 더 풀리는 것을 막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81년 21.4%, 1982년 7.2%로 낮아지더니 1983년 3.4%까지 내려갔다.

 

이와 함께 중화학공업 분야의 과잉·중복투자도 정리했다. 생산 재원 상당수가 생산성이 낮은 중화학에 묶여있어 다른 분야에는 활용되지 못하는 등 구조적인 모순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부실기업들을 과감히 정리하고 될성 싶은 기업만 남기는 구조조정이 성공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전두환 정부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린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의 역할이 컸다. 전 전 대통령은 그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전권을 맡겼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이 군인이면서 정치인이었지만 경제를 모른다는 한계를 솔직히 인정한 것이다.

 

 

전두환 정부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 집권 초기부터 세계적인 3저 호황(저달러ㆍ저유가ㆍ저금리)까지 겹치면서 한국 경제는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매년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었다. 두 전 대통령이 국가 업그레이드를 목표로 추진해 유치했던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통해 국가 이미지도 한층 높아져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전 전 대통령 재임 기간 1인당 GDP는 1980년 약 1714 달러에서 1988년 4754.5 달러로 2.8배로 늘었고, 만성적 무역적자도 흑자 구조로 바뀌었다. 한국 경제는 지속 성장궤도로 접어들었고, 중산층도 두터워졌다. 부가가치가 높은 자동차ㆍ전자ㆍ반도체 같은 첨단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김 · 정 · 훈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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