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2월 15일, 집으로 귀가하던 북한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씨가 북한에서 직파된 공작원에 의해 피격, 살해된지 어언 20여년이 지났다.
2003년 어렵게 시작한 국가배상 청구 소송이 5년여의 세월이 흘러간 이후 원고 승소 판결이라는 고인의 명예회복을 위한 초보적인 단초를 마련했지만, 여전히 우리사회의 무관심속에 숨어 살아야했던 가족들의 나날들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남은 가족들에게 가장 뼈아픈 고통은 고인의 죽음에 대해 너무나도 태연히 거짓 잣대를 들이대는 것과 우리 사회 내부에 여전히 암약하고 있는 공산좌익세력들로부터 온전히 가족의 안녕을 지킬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일반 시민들은 20여년이 지난 세월이기에 이제는 잊혀질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가족의 일부를 잃은 고통은 세월이 지나도 어느 한순간 바로 며칠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 바로 ‘트라우마(trauma,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고통의 시간들속에서도 유언이라도 남길 수 있었던 고인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마저도 어려었던 가족의 유언 아닌 유언이 있었음에도, 선뜩 세상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 바로 유가족들이기에 보는 이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이한영씨는 생전 자신의 부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싸워라. 끝까지 싸워야 한다" 고.
하지만 어떻게 싸워야 하나? 그 상대가 직접 맞설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냐, 세력이냐를 알고 나서도 가능할 일일까?
故 이한영씨의 국가 상대 재판과 이번 진실위 규명 촉구를 지원하고 있는 피랍탈북인권연대 도희윤 대표는 “대한민국처럼 총기로부터 안전한 나라는 드뭅니다. 그런 나라에서 총격테러로 사망한 사람이 얼나마 될까요. 아마도 손가락으로 꼽을 지경일 것이고, 더구나 북한 공작원에 의한 테러로 사망한 경우는 이한영씨가 거의 첫 번째 희생자일 것입니다...”
전무후무한 테러사건의 피해자인 故 이한영씨 가족이 최근(11월 22일)에 또다시 용기를 내어 진실앞에 서려고 한다. 국가배상 소송 이후 더 이상 세상 앞에 나서기가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위)의 활동 범위 중에 ‘북한에 의한 테러’에 대해 국가가 그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조항이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도희윤 대표는 22일 태영호 의원과 기자회견 후, '진실위' 정근식 위원장을 면담하면서 "진실위가 가족의 아픔과 고통에 적극 동참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진실위가 이한영씨 사건을 제대로, 그리고 신속히 처리할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은게 사실이다. 국민의 한사람으로 지켜보겠다." 고 강력히 촉구했다고 한다.
20여년 전 자신들의 최고지도자 명예를 위해 친인척의 총기 살해도 마다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체제유지와 권좌를 지키기 위해 바로 얼마 전 외국에서 독극물 테러로 이복형제조차 무참히 살해하는 체제가 바로 북한이다.
그런 사회를 향해 하염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남녘의 요즘 풍토에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어렵사리 꺼내든 용기는 바로 우리 모두의 용기이어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여야만 '정상적'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것이다.
강 · 동 · 현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