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희윤의 잊지 못할 시리즈 ①] 김성일 編

2020.12.04 09:30:57

혁명(革命)은 그렇다. 장애물이 있다면 넘고 부숴서라도 전진(前進)해야

 

필자는 북한인권운동, 反金 왕조 혁명운동에 매진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고 가슴 아픈 사연을 월간조선(月刊朝鮮)이라는 언론을 통해 기고한 바 있었다. (2019년 6월 ~ 2020년 6월 총 10회 기고)

열 번에 걸쳐 장문의 내용으로 쓴 기고였기에, 다양한 일화와 사건사고·주장 등이 게재가 되었으니, 북한내부의 저항세력이 어떤 실천과 고뇌가 있었는지 살펴보는데 나름 의미있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특별한 계기를 통해 ‘대한민국·자유·독자’라는 모토로 창간하게 된 리베르타스(LIBERTAS) 인터넷 신문이 출발하였다. 앞으로 다양한 독자분들을 만나 스스로 간직해온 ‘잊지 못할 추억’들을 게재할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는 즈음, 다시 한번 북한의 아우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잊지 못할 첫 번째 시리즈로 북한의 아우를 소개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이고 속보이는 자기욕심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었을지 아니면 정치범수용소에서 구원의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수인(囚人)일지,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조차 생사를 알지 못하는 비극의 상황에서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져 있을 아우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는 생각이었음을 널리 독자분들께서 이해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

 

필자의 잊지못할 시리즈는 인터뷰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사실이다.

 

북한의 아우 또한 거의 매일 통화와 채팅을 통해 자유혁명(自由革命)을 논의해온 사이였기에, 비록 지금 다시 만나지는 못하지만 인터뷰 형식을 빌어 아우의 흔적을 찾아가려 한다.

 

- 북한 내부의 혁명조직원이자 아우인 ‘김성일’씨는 어떤 사람이었나.

 

북한당국이 ‘우리민족끼리’라는 유튜브에 필자와 아우의 얼굴을 공개하면서 이름을 ‘김성일’ 이라고 했다. 학력은 중졸(中卒)이라고 하면서 학력이 낮은 일개 노동자 신분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지금은 공식계정에서는 그 유튜브를 찾을 수는 없다.

 

아마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북한당국으로서는 더 이상 이같은 역사적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게 좋을게 없다는 것으로 정리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북한의 아우는 스스로 각종 기계 등을 조립, 제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차원적인 전자시스템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이 있을 정도의 뛰어난 공학도였고, 중졸의 학력으로 해외 노동자로 파견되기도 쉽지 않겠으나 스스로를 공학도라고 이야기를 할 이유도 없다.

엄격한 아버지에 한없이 자애로웠던 어머니의 추억을 간직한 아우는, 자신의 신장이 조금만 컸더라면 호위국(扈衛局)에 근무할 기회가 있었는데 하면서 필자의 몸무게, 신장 등등을 물어보며 개인신상에 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각별한 부정(父情)을 가지고 있던 그런 아버지였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는 말에 숙연해지던 기억이 아련하다. 흔히 선수들끼리의 대화속에 많은 것을 담고 있겠지만, 구체적인 직업을 이야기해야 할 즈음에는 과거 그런 곳에 몸을 담고 있었다는 식으로 교감을 나누었다.

평범한 직업은 아니었다. 필자와 대화할 당시의 상황에서도 해외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두고 전화 혹은 채팅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북한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 북한의 아우에게 디지털 기기로의 채팅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다만 외국과의 통화는 두가지 어려운 점이 존재했다. 우선 비용이 장난이 아니었다. 국제전화비용이라는 것이 미국, 일본을 제외하고 상당하다는 것은 독자분들도 잘 아시리라 본다.

두 번째는 보안상의 문제였다. 북한의 해외 노동자든 공관원이든 우리에게는 너무나 일상이 되어버린 전화이지만 결코 자유롭지 않다. 아우의 손전화(휴대폰)도 어렵게 구입한 것으로 안다. 물론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손전화도 가지고 있었는데, 모든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들여다보는 북한사회의 특성상 공용 전화를 사용할 수는 없는 문제다.

송수신 신호 체계도 문제였다. 일단 외국으로의 통화 자체는 의심을 살만한 충분한 사유가 되니, 쓰지 않고 가지고 있던 태블릿폰을 건네주기로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수많은 대화와 자료들이 이것을 통해 원활하게 오고갔으니 말이다. 디지털 시대의 혜택을 톡톡히 본 샘이다.

 

- 월간조선 기고문을 보면 첫 채팅의 연결이 많이 어려웠다고 했는데 어떠했나.

 

우선 태블릿폰의 전달부터 대단히 어려운 문제였는데 그냥 우편택배처럼 전달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말이다. 누가 보냈는지, 찾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게끔 은밀히 진행해야만 했다. 물건의 전달이 무엇보다 기뻤고 태블릿에 깔아둔 SNS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때 뛸 듯이 기뻤다. 이런 현상이 바로 북한이라는 비정상적 사회와 정상사회의 소통이라고 보면 되는데 아마 독자분들은 쉽게 믿어지기가 어려울 것이다.

 

 

 

- 두 사람이 가장 많이 나눈 대화는 어떤 것이었나.

 

혁명(革命)이었다. 남북한을 통틀어 새로운 가치혁명(價値革命), 체제혁명(體制革命), 자유혁명(自由革命)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우는 북한을 혁명대상으로 했고, 필자는 북한과 함께 남한도 그 대상에 포함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대한민국 상황도 종북세력(從北勢力)들에 점령당하는 와중에 있음을 심히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탄핵 이전 상황을 보더라도 우리 사회는 정상이 아니었다. 북한, 중공, 그리고 그들의 추종세력들이 한꺼번에 자유 대한민국을 삼키려고 총공세를 펼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북한의 아우와 필자는 만난 것이었다. 운명(運命)이라면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던 샘이다.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아우의 식견으로 남한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엄청난 방종(放縱)과 무책임(無責任)의 현장으로 보였기에 이에 대한 논쟁이 많았다. 상당부분 수용하면서도 민주주의 제도의 우수성을 공유하려고 나름 노력했던 것 같다.

 

아우의 글 솜씨는 장난이 아니었다. 북한당국이 밝힌 중졸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어휘력이었다. 필자가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북한에도 실력자가 참으로 많다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억눌린 채 창발력(創發力)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는 황무지에서도 이런 엘리트가 뿌리 채 뽑히지 않고 존재하는 것만도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월간조선에 기고하지 않은 내용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10번의 기고였고 상당한 분량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아우와 나눈 대화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그 많은 글들을 주고 받았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마 거의 미쳐버린 시간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분 좋은 열정의 시간 말이다.

 

이 자리를 통해 몇가지를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당시 아우의 경험을 적은 내용이었다.

 

1986년 조선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앞으로 한장의 무기명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최기하 선생 귀하.

당신들이 사상사업에 씨를 뿌린지도 어언 40년 세월이 흘렀소.

그러나 왜 그토록 바라는 열매를 아직도 거두어 들이지 못하는 원인을 내 이제야 알았소.

그것은 당신들이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요,

당신들이 바라는 만민이 평등한 공산주의사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거요... (생략)

 

그 다음은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조직사업과 선전선동부의 선전사업이 서로 앞뒤가 다르며, 조직사업으로는 중앙당 특권층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선전사업으로는 온 사회에 서로 돕고 이끄는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잘사는 사회를 건설한다고 양면적 행동을 심하게 질책하였다. 내용은 장문의 문장이었으며 당의 조직사업과 사상사업이 솔직하게 일관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의 내용을 보고받은 김정일이 즉시 잡으라는 지시를 내렸고, 수사기관은 편지의 내용에서 필자의 직업, 나이, 성별, 학력관계, 거주지, 사회생활경위를 48시간 안에 추리하여 300명 정도의 혐의자의 명단을 만들었다. 그 명단에 있는 대상들의 집과 사무실을 수색하여 물중과 함께 투서자를 체포하였다. 사건 발생 2일 만에 혐의자 명단이 작성되고 5일 만에 체포하였으며, 7일만에 사건은 종료되었다.

편지의 원문은 아직도 보위부 평양 기술대학에 교재로 진열,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사건의 명칭은 평양00대학 강좌장 무기명 투서사건이다.

 

 

또 하나의 일화는 북한의 아우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며 기술한 내용이다.

 

“ 제가 16살 나던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평생을 군복을 입고 계셨고 군대에서 정치부 조직일군으로 근무하였다. 나는 이런 아버지 밑에서 일찍부터 수령님(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교육을 받았다. 하루는 아버지가 수령님의 책이라고 하면서 책 한권을 가져다 주며 학습하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여러가지 책을 가져다 준 다음 꼭 그 독후감을 듣군 하였다.

 

그 책의 내용은 김일성의 고상한 인민적 풍모와 인정 따뜻한 마음씨를 엿보게 하는 실화 자료들이었다.(중략) 아버지가 어느날 저녁 독후감에 대하여 이야기 하라고 하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문학에는 취미가 없었고 공학에 마음이 가 있었다. 항상 따져 보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어 공학적인 해석으로 수령님의 덕성실기를 해설하기 시작하였다.

 

수령님께서 농장에 가시면 아이들에게 부모들의 대를 이어 고향 농촌마을을 꽃피우라고 하시고, 어촌에 가시면 아이들에게 부모들의 대를 이어 바다를 정복하라고 하시고, 탄광에 가시여서는 아이들에게 탄전의 주인이 되라 하시고, 만경대 혁명학원에 가시여서는 부모들의 대를 이어 나라의 훌륭한 일군이 되라 하시는데, 이것은 부모가 농민이면 자식도 농민, 탄부면 자식도 탄부, 어부면 자식도 어부, 마지막에 남는 것은 혁명학원 원아들인데, 부모가 공을 세웠으면 자식도 대를 이어 간부가 되는가요? 이것은 조선시대 봉건적 신분계급제도가 아닌가요? 다른 나라가 문명 개화국으로 나갈 때 우리나라는 개국부국을 하지 않고 봉건적 은둔국으로 남아있다 국력이 쇠약해져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겨 나라가 망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의 이 말을 들으시더니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것이였다. 수십년 세월이 흘렀지만 세길 네길 뛰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 북한의 아우가 살아 있을까.

 

가능성이 전무하지는 않지만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북한당국은 두려웠을 것이다. 북한역사를 통틀어 이처럼 구체적이고 위협적인 혁명조직(革命組織)의 실체를 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의 두자리에 가까운 조직원들이 체포,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탈북인이 갑자기 연락이 왔었다. 도대표께서 이 일에 연루된 줄은 몰랐다면서 자신이 해당 사건의 경과와 피해자에 대한 조사를 은밀하게 진행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전해들은 사건의 처리과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 아우 ‘김성일’을 위한 과업이 있다면.

 

과업, 좋은 말인데 아우가 자주 사용했던 북한식 표현이다. 남은 과제는 참으로 많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혁명가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揮毫)에도 나오는 말이다. 중단(中斷)없는 전진(前進).

그런 의미에서 박대통령도 혁명가(革命家)였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넘거나 부숴서라도 가야하는게 숙명이고 운명인거다. 얼마나 많은 북한주민들이 흔적도 없이 스러져갔을까를 생각하면, 남은 과제는 보다 명확해진다.

그 주민들의 못다한 일들을, 그들의 십자가를 대신 넘겨받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내가 쓰러지면 그 다음 누군가가 또 짊어지고 가면 된다. 과업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 ‘운명(運命)’이라는 책을 쓴 모양인데, 결단코 말하건데 그 운명과 제 운명은 정 반대다. 그래서 나에게 적(敵)은 분명하다.

 

 

도 희 윤 <발행인 /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도희윤 기자 dhy21c@gmail.com
Copyright @리베르타임즈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5길 12 타운빌 2층 | 이메일: libertimes.kr@gmail.com | 전화번호 : 02-735-1210 등록번호 : 415-82-89144 | 등록일자 : 2020년 10월 7일 회장/편집위원 : 지만호 | 발행/편집인 : 도희윤 기사제보 및 시민기자 지원: libertimes.kr@gmail.com [구독 / 후원계좌 : 기업은행 035 - 110706 - 04 - 014 리베르타스협동조합] Copyright @리베르타임즈 Corp. All rights reserved.